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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위화도 회군, 사대주의가 나라를 세우다

지난 글 「 ⑪ 이성계는 왜 위화도에서 돌아섰나? 」를 나는 이렇게 마쳤다. 땅은 잃었다가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나라의 시작부터 자주성을 내려놓은 나라는 어떻게 되는가? 이번 글은 그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이다. 우리 역사에서 제일 비극적인 사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불렀다. 독립당과 사대당의 싸움에서 사대당이 이기면서 우리 역사가 진취의 기상을 잃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묘청이 진 뒤에도 고려는 자주를 잊지 않았다. 공민왕은 원나라에 빼앗긴 땅을 되찾았고, 우왕과 최영은 명나라 연호를 버리고 요동으로 군대를 보냈다. 꺾인 기상은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그 기상을 다시 꺾은 것이 위화도 회군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꺾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회군을 이끈 사람이 새 나라를 세웠다. 묘청의 난에서 이긴 사대의 논리가, 이제 한 나라의 뼈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위화도 회군과 조선의 건국을 우리 역사에서 제일 비극적인 사건으로 부른다. 나라 이름을 황제에게 물었다 1392년 7월,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해 11월, 그는 한상질을 명나라 서울 남경으로 보냈다. 새 나라의 이름을 정해 달라는 글을 함께 보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과 화령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태조실록』 태조 1년 11월 29일) 석 달 뒤인 1393년 2월 15일, 답이 왔다. 동이(東夷)의 국호에 다만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태조실록』 태조 2년 2월 15일, 명 예부의 자문) 이성계는 명나라 황제의 궁궐 쪽을 향해 은혜를 사례하는 절을 올렸다. 한상질에게는 밭 50결을 내렸다. 그리고 온 나라에 교...

⑪ 이성계는 왜 위화도에서 돌아섰나?

지난 글 「 ⑩ 철령위는 어디였나? 」에서 나는 명나라의 정사가 남긴 한 줄을 소개했다.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으니 곧 옛 철령성이다. 고려와 경계를 맞댄다. (東南有奉集縣 即古鐵嶺城也 接高麗界) (『명사』 권41, 지리지 요동도지휘사사 철령위) 명나라가 1388년 3월 철령위를 세운 곳은 함경남도가 아니었다. 지금의 심양 남쪽, 고려와 경계를 맞댄 요동이었다. 명나라 스스로 그렇게 적었다. 그해 4월, 고려의 군대가 그 요동을 향해 평양을 떠났다.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이끄는 3만 8천여 명이었다. 그리고 한 달 뒤, 그 군대는 압록강의 작은 섬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이성계는 왜 돌아섰을까? 그리고 그가 돌아서지 않았다면 요동은 우리 땅이 되었을까? 봉주의 '네 가지 불가' 1388년 4월 1일, 우왕은 봉주에서 최영과 이성계를 불렀다. "내가 요양을 치려 하니 경들은 힘을 다하라." 이성계는 반대했다. 지금 군사를 내는 데에는 네 가지 불가한 것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이 첫째 불가입니다.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둘째 불가입니다. 나라를 들어 멀리 정벌하면 왜구가 그 빈틈을 탈 것이 셋째 불가입니다. 때가 바야흐로 덥고 비가 오는 철이라 활의 아교가 풀리고 큰 군대가 역병을 앓을 것이 넷째 불가입니다. (以小逆大 一不可 夏月發兵 二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四不可) (『고려사』 권137, 열전50 신우 14년 4월) 네 가지 가운데 둘째부터 넷째까지는 때와 형편의 문제다. 장수라면 당연히 따져야 할 일이다. 그런데 첫째는 다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불가하다." 이것은 전술이 아니라 나라를 보는 눈이다. 이성계는 그 눈을 맨 앞에 두었다. 흔히 위화도에서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이 '네 가지 불가'는 출병 전 봉주에서 처음 한 말이고, 위화도에서도 같은 이유를 되풀이했다. 이성계는 서경에 머물렀다가...

⑩ 철령위는 어디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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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 ⑨ 공민왕은 왜 요동을 쳤나? 」에서 나는 1370년 이성계가 압록강을 건너 요양을 친 이야기를 따라갔다. 그로부터 18년 뒤, 이성계는 다시 압록강에 섰다. 이번에는 건너지 않았다.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렸다. 위화도 회군이었다. 그 회군의 배경에 철령위가 있다. 따라서 위화도 회군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령위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 교과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에 붙이겠다고 통보했다. 우왕과 최영은 이에 맞서 요동 정벌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철령은 함경남도 안변과 강원도 회양 사이에 있는 고개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철령」 — 이덕일, 『도둑 맞은 한국사』, p.205~206 재인용)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명나라가 함경남도에 철령위를 세우려 했다면 고려 군사는 동쪽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고려 군사는 북쪽 압록강으로 갔다. 명나라는 철령위를 정말 어디에 세웠을까? 그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명나라는 왜 하필 1388년에 이 문제를 들고 나왔을까? 명나라는 왜 1388년에 철령을 들고 나왔나 원나라는 쫓겨났지만 요동은 남아 있었다 1368년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웠다. 원나라는 몽골 초원으로 물러났다. 이를 북원이라 부른다. 그러나 요동은 바로 명나라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1371년 『고려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북원의 요양성 평장 유익과 왕우승 등이 명나라에 귀부하려 하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백성을 다른 곳으로 옮길까 염려하였다. 요양은 본래 우리 땅이니 우리나라가 청하면 옮기는 것을 면할 수 있을까 하여 사신을 보내 알려 왔다. (北元遼陽省平章劉益王右丞等欲歸附大明 慮遷居民 以遼陽本我地 若我國請命 可免遷徙 遣使來告) (『고려사』 권43, 공민왕 20년 윤3월) 요양의 원나라 관리들이 고려에 도움을 청하며 내세운 까닭은 "요양은 본래 우리(고려) 땅"이라는 것이었다. 「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에서 살펴본 대로 요양은 고려...

⑨ 공민왕은 왜 요동을 쳤나?

지난 글 「 ⑧ 묘청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하편) 」 끝에서 나는 물었다. 작은 나라는 자신들의 연호도 가질 수 없고,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정말 불가한 일인가? 그 물음의 답을 찾으려면 1370년의 압록강으로 가야 한다. 1370년 정월, 동북면의 장수 이성계가 기병 5천과 보병 1만을 이끌고 황초령을 넘었다. 600여 리를 가서 설한령에 이르렀고, 다시 700여 리를 가서 압록강을 건넜다. 그날 저녁 서북쪽 하늘에 자줏빛 기운이 가득했다. 하늘을 살피는 서운관은 "용맹한 장수의 기운"이라고 했다. 공민왕은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이성계를 보냈으니, 필히 그에 대한 응험이다. (『고려사』 권42, 공민왕 19년 정월) 요동을 치러 압록강을 건넌 이 장수가, 18년 뒤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린 바로 그 이성계다. 공민왕은 왜 요동을 쳤을까? 그리고 고려는 그 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원나라 때 빼앗긴 땅 묘청의 난이 끝난 뒤 고려는 무신정변을 겪었다. 이어 몽골이 쳐들어왔다. 40년 가까이 싸운 끝에 고려는 원나라와 강화했다. 그 과정에서 북쪽 땅을 두 번 잃었다. 동북쪽: 1258년 원나라는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두고 그 북쪽을 직접 다스렸다. 서북쪽: 1269년 서경의 최탄 등이 서경과 여러 성을 들어 몽골에 항복했다. 몽골은 그곳에 동녕부를 두었다. (「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 원나라의 정사 『원사』는 동녕로를 요양행성 아래에 두었다. 동녕부는 요양, 곧 요하 동쪽에 있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의현, pp.286~288) 땅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고려의 임금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해야 했다. 임금의 이름 앞에는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의 '충(忠)' 자가 붙었다. 고려는 자기 연호 대신 원나라의 연호를 썼다. 그 틈에서 원나라에 기대어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가장 큰 이가 기철이다. 그의 동생은 원나라 순제의 황후, 기황후였다. 공민왕은 뒤에 이렇게 말했다. 기철 등은 임금을 떨...

⑧ 묘청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하편)

1135년 정월, 묘청은 분사시랑 조광, 병부상서 유참 등과 함께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임금을 버린 반란이었나 그런데 이 반란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서경 쪽은 새 임금을 세우지 않았다. 이덕일은 이것을 인종을 황제로 받들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p.248) 개경에서 사신이 오자 서경의 장수들은 군복 차림으로 뜰에 내려와 절했다. 왕의 안부를 묻고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편지 한 통을 주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입니다." (『고려사』 권127, 묘청전) 이어 서경이 올린 표문은 더 분명하다. 폐하께서는 음양의 지극한 말을 믿고 대화궁을 지으셨으니, 천하의 황제가 머물 도읍을 만드신 것입니다. … 그런데 신하들이 임금의 마음을 본받지 않고 자기 고향 땅만 생각하여 천도를 주저하고 가로막을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 폐하께서 수레를 타고 오신다면 병기를 버리고 싸움을 멈출 것입니다. 서경이 겨눈 것은 왕이 아니었다. 왕을 붙잡고 있는 개경의 신하들이었다. 개경의 신하들은 "신하가 임금을 부르니 그 사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종은 사자에게 술과 비단을 내리고 벼슬까지 주어 돌려보냈다. 김부식은 정지상부터 죽였다 김부식은 서경에서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기 전, 재상들에게 말했다. "서경의 반역은 정지상·김안·백수한이 함께 꾸민 것이다. 이들을 없애지 않으면 서경을 평정할 수 없다." 그리고 세 사람을 궁문 밖으로 끌어내 목을 벤 뒤에 왕에게 알렸다. (『고려사』 권98, 김부식전) 『고려사』는 당시 사람들의 말도 함께 적어 두었다. 김부식은 평소 정지상과 문장으로 이름을 다투었는데, 쌓인 불만 때문에 이때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고려사』 권127, 묘청전)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묘청이 왕명 없이 국호를 고치자 정지상은 왕 곁에서 묘청을 반대했다고 했다. (『조선상고사』 ...

⑦ 묘청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상편)

지난 글 「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에서 나는 고려의 서경이 지금의 요양이었다고 썼다. 이번 글은 그 서경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1135년 정월, 서경의 승려 묘청이 군사를 일으켰다. 서경에 와 있던 개경 관원들을 붙잡아 소금 창고에 가두었다. 개경 사람이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두었다. 군사를 보내 개경으로 가는 고갯길을 끊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했다. 하늘이 열렸다는 뜻이다. 군대는 '하늘이 보낸 충의군',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불렀다. 신채호는 이 사건을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불렀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을 '묘청의 난'이라는 이름으로만 기억한다. 교과서에는 몇 줄 나올 뿐이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갖고 있었다. 묘청은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개경 쪽과 무엇이 어떻게 달랐나? 묘청은 왜 반란까지 일으켜야 했나? 반란이 끝난 뒤 고려는 어떻게 바뀌었나? 이 질문을 가지고 나는 답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부모의 나라에서 신하의 나라로 묘청을 이해하려면 먼저 1126년 봄의 개경을 봐야 한다. 여진은 오랫동안 고려를 섬기던 사람들이었다. 신채호는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에 "여진은 고려를 종이 주인 섬기듯 했다(女眞奴事高麗)"는 말이 있고, 『고려사』에 실린 여진의 국서에도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긴다"는 말이 있다고 적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총론, 번역본 p.71) 그 여진이 1115년 금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고려와의 관계를 두 번 뒤집었다. 첫 번째는 1117년이다. 금나라 임금 아골타가 고려에 글을 보냈다. 형인 대여진 금국 황제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우리 조상 때부터 한쪽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큰 나라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겨 조심스럽게 섬겼다. … 왕께서 화친을 허락하여 형제가 되어, 대대로 끝없는 우호를 이루기 바란다. (兄大女眞金國皇帝 致...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지난 글 「 ⑤ 귀주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까지 세 편에 걸쳐 나는 서희의 강동6주와 귀주대첩의 자리를 따라갔다. 그런데 그 세 편에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었다. 고려의 서경은 지금의 요령성 요양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전제를 당연한 것처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정면으로 따져 본 적은 없다.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교과서가 말하는 서경 교과서는 고려의 서경을 지금 북한의 평양이라고 가르친다. 근거는 『고려사』 지리지다. 『고려사』는 서경을 '서경유수관 평양부'라 하고, 본래 고구려 장수왕이 도읍한 평양이라고 적었다. (『고려사』 권58, 지리지 북계 서경유수관 평양부) 여기까지는 다툴 것이 없다. 고려의 서경은 고구려의 평양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교과서는 고구려의 평양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라고 본다. 그래서 고려의 서경도 지금 북한의 평양이 된다. 나는 「 ③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어디인가? 」에서 그 평양이 지금의 요양이라고 썼다. 그렇다면 고려의 서경도 요양이어야 한다. 이번에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고려시대의 기록으로 이것을 확인해 보려 한다. 고려의 서경을 차지한 나라의 기록 1269년 서경의 최탄 등이 북계의 60여 성을 들어 몽골에 항복했다. 몽골은 서경에 동녕부를 두었다. 고려의 서경을 20년 가까이 직접 다스린 나라가 바로 원나라다. 그 원나라의 정사 『원사』 지리지는 동녕로를 이렇게 적었다.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성을 함락한 이후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겨갔다. 압록수 동남 천여 리에 있는 것은 옛 평양이 아니다. 왕건에 이르러 평양을 서경으로 하였다. … 8년(1271) 서경을 동녕부로 고쳤다. (『원사』 지리지 동녕로 — 『압록과 고려의 북계』, p.146 재인용) 이 기록은 세 가지를 한꺼번에 말한다. 동녕로는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다. 그곳이 고려의 서경이었다. 그리고 "압록수 동남 천여 리에 있는 것", 곧 지금 우리가 ...

⑤ 귀주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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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 ④ 거란은 왜 강동6주를 내주었나? 」에서 나는 거란의 자리에 서서 서희의 담판을 다시 보았다. 송과의 문제가 정리되자 거란은 강동6주를 되찾으려 했다. 거란은 1010년과 1018년, 두 차례 더 고려에 크게 쳐들어왔다. 귀주는 「 ③ 서희의 강동6주는 어디인가? 」에서 따라간 서희의 여덟 성 가운데 하나다. 서희가 담판 이듬해인 994년에 쌓은 성이다. 그로부터 25년 뒤, 강감찬이 바로 그 귀주에서 거란군을 무찌렀다. 우리가 살수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3대 대첩이라 부르는 귀주대첩이다. 교과서는 귀주를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지난 글에서 서희의 성들이 요령성에 있었을 가능성을 살폈다. 그렇다면 귀주대첩의 자리도 다시 물어야 한다. 『고려사』가 적은 귀주대첩 1018년 12월, 거란이 세 번째로 쳐들어왔다.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맞섰다. 기병 1만 2천을 산골짜기에 숨기고, 쇠가죽을 큰 밧줄로 꼬아 성 동쪽의 큰 내를 막았다. 적이 오자 막은 물을 터뜨리고 복병을 내어 크게 이겼다. (『고려사』 권94, 열전7 강감찬) 거란군은 개경 가까이까지 내려왔다가 물러갔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개경은 어디였을까. 청나라의 고증은 『독사방여기요』를 인용해 이렇게 적었다. "개경은 곧 개주성(開州城)이다. 왕경(王京)의 서남쪽 200리에 있다. 이때 거란이 개경을 치자 왕은 평주로 달아났다." (開京 即開州城 在王京西南二百里 — 『압록과 고려의 북계』, 윤한택, 「고려 서북 국경에 대하여」, p.35 각주 재인용) 거란의 2차 침입(1010) 때를 두고 한 말이다. 나는 이 기록을 따른다. 거란군이 내려온 개경은 개주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 거란군은 돌아가는 길에 귀주를 지났다. 거란 군사가 귀주를 지나가자 강감찬 등이 동쪽 들에서 맞아 싸웠다. 두 군대가 맞서 승부가 나지 않았다.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우리 군사가 기세를 타고 내달아 치니 용...

④ 거란은 왜 강동6주를 내주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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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 ③ 서희의 강동6주는 어디인가? 」에서 나는 강동6주의 자리를 따라갔다. 그런데 글을 마친 뒤에도 물음 하나가 남았다. 거란은 정말 서희의 말에 설득되어 땅을 내주었을까? 서희가 말을 잘한 것은 맞다. 그러나 나라와 나라 사이는 말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오랫동안 해외에서 일하며 그것을 몸으로 배웠다.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가 양보할 때에는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렇다면 거란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 이번에는 거란의 자리에 서서 그 담판을 다시 보려 한다. 거란의 진짜 적은 송이었다 거란은 916년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차근차근 등 뒤를 정리했다. 926년 발해를 무너뜨렸고, 936년에는 후진으로부터 연운 16주를 받아 중원으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했다. 960년 송이 일어났다. 송은 979년 북한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했다. 이제 거란과 송은 국경을 맞대고 직접 맞서게 되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29) 986년 송 태종은 연운 16주를 되찾으려고 세 길로 대군을 보냈다. 거란은 세 길 모두에서 송군을 물리쳤다. (위키백과 「Chanyuan Treaty」) 『압록과 고려의 북계』는 이 전쟁을 "통화 9년(991)경"이라고 적었지만, 송의 대규모 북벌은 986년의 일이다. 거란은 이 무렵 동쪽으로도 향한다. 성종이 즉위한 뒤 여러 차례 여진과 정안국을 쳤다. 990년에는 압록강 가의 요지에 성을 세워 여진과 송이 오가는 길을 막았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29) 발해도, 여진도, 정안국도 정리되었다. 거란의 등 뒤에 남은 나라는 하나였다. 고려다. 거란이 고려에 온 까닭 『압록과 고려의 북계』에서 남주성 교수는 993년 거란이 침입한 까닭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송과 중국 대륙을 놓고 결전을 함에 앞서 고려와 송과의 동맹관계를 단절하고, 한걸음 나아가 고려를 거란에 복속시킴으로써 송 정벌에 전념하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 고려가 개척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③ 서희의 강동6주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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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두 편에서 나는 고려의 국경을 이야기하였다. 천리장성은 평안북도의 험한 산줄기가 아니라 요령성 평야에 있었고, 윤관의 동북9성은 함흥평야가 아니라 두만강 너머에 있었다. 그런데 나는 중요한 이야기 하나를 건너뛰었다. 천리장성보다 40년 앞서, 고려의 서북 국경을 처음 넓힌 사람이 있었다. 서희다. 서희의 담판은 우리 외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다. 칼 한 번 섞지 않고 땅을 얻었다. 교과서는 그 땅을 '강동6주'라 부른다. 흥화진은 의주, 용주는 용천, 통주는 선천, 철주는 철산, 곽주는 곽산, 귀주는 구성. 모두 지금의 평안북도다. 우리가 배운 강동6주 (연두색) 갑자기 웃긴 생각이 든다. 저 지도의 연두색 영역이 강동6주가 맞다면 명칭이 '강하6주'가 정확하지 않는가? 그런데 역사는 '강동6주'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희는 무엇을 말했는가 성종 12년(993) 10월, 거란 장수 소손녕이 쳐들어왔다. 소손녕은 글을 보내 "80만 군사가 이르렀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려 조정은 흔들렸다.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고 황주에서 절령까지를 경계로 삼자는 말까지 나왔다. 서희가 반대했다.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까지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이 차지하고 있던 곳입니다. 광종께서 이를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온 뜻은 이 두 성을 빼앗으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고려사』 권94, 열전7 서희) 이 말을 기억해 두자. 뒤에서 다시 꺼낼 것이다. 서희는 국서를 들고 적진으로 갔다. 소손녕이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 너희가 침범했다"고 말하자 서희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 땅의 경계를 따진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 안에 있다. 어찌 침범이라 하는가. 또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

② 윤관의 동북9성은 어디에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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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세 편에서 나는 고려의 서북 국경을 말하였다.  평양은 지금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요양이고, 압록강은 지금 북한의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이고, 천리장성은 의주와 동해안 도련포를 잇는 험준한 산악 지대에 쌓은 장성이 아니라 요령성 평야지대에 있었다.  이번엔 방향을 바꾸어 고려의 동북 국경, 윤관이 여진을 몰아내고 세웠다는 9성 이야기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고려의 북방 경계선 전체를 그려볼 예정이다. 동북9성 위치에 대한 두 가지 학설 동북9성은 1107년, 고려 예종의 명을 받은 윤관과 오연총이 여진을 정벌하고 세운 것이다.  문제는 그 9성이, 특히 가장 북쪽 경계였던 공험진과 선춘령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가이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에 실린 이인철(경복대학교 교수)의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의 위치 연구」(선도문화 제23권, 2017.8.30 게재)는 이 문제를 두고 엇갈려 온 학설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 중 두 갈래, 함흥평야설과 두만강 이북설을 살펴본다. 함흥평야설은 조선총독부에서 나왔다 지금 교과서가 그리는 동북 9성, 함흥평야 일대라는 위치 비정은 어디서 왔을까. 책은 그 출처를 분명히 적어놓았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가 1932년 펴낸 『조선사(朝鮮史)』다. [조선사편수회는] 1932년에 간행한 『조선사(朝鮮史)』에서도 동북9성의 위치를 두만강 이남 함경도 남부의 지명들로 확정하여 표기하였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p.87, 각주 6: 朝鮮史編修會 編, 1932, 「朝鮮史」 第3編2卷, 朝鮮總督府, p.186, p.191, p.195) 「고려사」 가 말하는 동북9성 두 번째가 두만강 이북설이다. 이 학설은 「고려사」 원문에서 출발한다. 고려 태조는 신라에게서 항복받고 백제를 멸한 고구려의 땅으로부터 일어나 도읍을 개경으로 하였다. 서북은 당나라 이후로 압록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서북은 고구려의 지역에 못 미쳤으나, 동북은 고구려 영토보다 더하였다. 원문: 高麗太祖 ...

① 천리장성은 어디에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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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 소개한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과 고대 압록강의 위치 이외에, 학창 시절부터 나를 의아하게 만드는 질문이 하나 더 있었다. 교과서는 고려가 거란을 막기 위해 덕종과 정종 때(1033~1044) 압록강가 의주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천여 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그 천리장성이 지나간다는 땅을 지도에서 찾아보면, 평안북도의 낭림산맥과 적유령산맥을 지난다. (참고로, 두 산맥의 평균 고도는 800~1,500미터, 낭림산맥의 최고봉 와갈봉은 2,260미터, 적유령산맥의 최고봉 숭덕산은 1,994미터다.) 장수왕이 옮긴 평양의 위치에 의구심을 품었던 것처럼, 나는 이 대목에서도 같은 의문을 가졌다. 굳이 그렇게 높고 험한 산 위에 천 리가 넘는 장성을 쌓아야 했을까? 높고 험한 산은 그 자체가 이미 방어선이 아닌가? 우리가 알고 있는 천리장성 먼저 지금 교과서와 백과사전은 천리장성을 대체로 이렇게 설명한다. 덕종 2년(1033) 평장사 유소(柳韶)의 주도로 축성이 시작되어 정종 10년(1044)경 완성되었다. 서쪽은 압록강 옆 인주(麟州), 동쪽은 정평 해안인 도련포까지. 길이는 천여 리(里), 높이와 폭은 각 25척(尺)의 석축. 거란과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 설명을 지도 위에 그대로 옮기면, 서쪽 의주에서 동쪽 함경남도 정평 해안까지 평안도와 함경도의 산줄기를 가로지르는 선이 그려진다. 내가 학생 때 배운 그 선이고 지금도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그 선이다. 그런데 지금도 이해하기 힘든 것은, 천리장성은 거란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인데 아래 지도는 당시 고려를 섬기던 여진을 막는 성이 아닌가? 그런데, 정작 『고려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고려사』의 두 기록 『고려사』에는 천리장성을 쌓은 기록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장성을 쌓은 유소의 열전이고, 다른 하나는 나라의 성 쌓기를 적은 병지(兵志)다. 먼저 『압록과 고려의 북계』가 소개한 열전이다. 덕종 2년(1033), 유소(柳韶)가 북경관방(北境關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