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거란은 왜 강동6주를 내주었나?
지난 글 「③ 서희의 강동6주는 어디인가?」에서 나는 강동6주의 자리를 따라갔다.
그런데 글을 마친 뒤에도 물음 하나가 남았다.
거란은 정말 서희의 말에 설득되어 땅을 내주었을까?
서희가 말을 잘한 것은 맞다. 그러나 나라와 나라 사이는 말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오랫동안 해외에서 일하며 그것을 몸으로 배웠다.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가 양보할 때에는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렇다면 거란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
이번에는 거란의 자리에 서서 그 담판을 다시 보려 한다.
거란의 진짜 적은 송이었다
거란은 916년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차근차근 등 뒤를 정리했다. 926년 발해를 무너뜨렸고, 936년에는 후진으로부터 연운 16주를 받아 중원으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했다.
960년 송이 일어났다. 송은 979년 북한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했다. 이제 거란과 송은 국경을 맞대고 직접 맞서게 되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29)
986년 송 태종은 연운 16주를 되찾으려고 세 길로 대군을 보냈다. 거란은 세 길 모두에서 송군을 물리쳤다. (위키백과 「Chanyuan Treaty」) 『압록과 고려의 북계』는 이 전쟁을 "통화 9년(991)경"이라고 적었지만, 송의 대규모 북벌은 986년의 일이다.
거란은 이 무렵 동쪽으로도 향한다. 성종이 즉위한 뒤 여러 차례 여진과 정안국을 쳤다. 990년에는 압록강 가의 요지에 성을 세워 여진과 송이 오가는 길을 막았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29)
발해도, 여진도, 정안국도 정리되었다. 거란의 등 뒤에 남은 나라는 하나였다. 고려다.
거란이 고려에 온 까닭
『압록과 고려의 북계』에서 남주성 교수는 993년 거란이 침입한 까닭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송과 중국 대륙을 놓고 결전을 함에 앞서 고려와 송과의 동맹관계를 단절하고, 한걸음 나아가 고려를 거란에 복속시킴으로써 송 정벌에 전념하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 고려가 개척해 차지하고 있던 압록강 하류 동쪽지역 일대의 땅을 장악해서 고려의 도전을 사전에 봉쇄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30)
거란이 바란 것은 고려 땅 전부가 아니었다. 송과 싸울 때 고려가 등 뒤를 치지 않는 것이었다.
서희는 이것을 꿰뚫어 보았다. 조정이 서경 이북을 떼어 주자고 할 때 그는 "지금 거란이 온 뜻은 가주와 송성 두 성을 빼앗으려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려사』 권94, 열전7 서희) 거란이 고려를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거란은 오래 싸울 수 없었다
소손녕은 80만 대군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 숫자는 과장이고, 15만 정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30 각주 25)
거란군은 봉산군을 깨뜨렸지만, 안융진에서 중랑장 대도수에게 막혔다. 그 뒤 소손녕은 더 내려오지 못했다. 남주성 교수는 이 일을 계기로 거란도 강화를 원하게 되었다고 본다. (같은 책, p.131)
거란의 큰 적은 송이었다. 송과 싸울 군대를 고려 땅에 오래 묶어 둘 수는 없었다. 거란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마무리였다.
거란이 내준 땅은 거란 땅이 아니었다
『요사』는 거란이 내준 땅을 이렇게 적었다.
조서를 내려 여진의 압록강 동쪽 수백 리 땅을 떼어 주었다(詔取女直鴨淥江東數百里地賜之).
(『요사』 권13, 성종본기 통화 11년)
'여진의' 땅이다. 거란이 다스리던 땅이 아니었다. 거란은 잃을 것이 거의 없었다.
서희의 논리도 바로 이 점을 겨눈다. 그는 소손녕에게 여진이 길을 막고 있어 조공을 못 한다고 했다. 여진을 쫓아내고 옛 땅을 돌려주어 성을 쌓고 길을 열게 해 주면 어찌 조공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고려사』 권94, 열전7 서희)
거란이 듣고 싶었던 말은 '조공', 곧 거란을 섬기겠다는 말이었다. 서희는 그 말을 해 주는 값으로, 거란이 잃을 것 없는 땅을 받아 냈다.
거란이 얻은 것
담판 바로 다음 해, 『고려사』 성종 13년(994) 조는 이렇게 적었다.
- 2월, "비로소 거란의 통화 연호를 썼다(始行契丹統和年號)."
- 4월, 시중 박양유를 거란에 보내 이제부터 거란의 달력과 연호(정삭, 正朔)를 쓰겠다고 알렸다(告行正朔). 다른 나라의 정삭을 쓴다는 것은 그 나라의 신하 나라가 되었다는 표시였다.
- 6월, 원욱을 송에 보내 지난해의 싸움을 갚을 군사를 청했다. 송은 북쪽 변경이 겨우 안정되었으니 가볍게 움직일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 "이때부터 송과 관계를 끊었다(自是 與宋絶)."
(『고려사』 권3, 성종 13년)
6월의 기록은 눈여겨볼 만하다. 고려는 거란에 완전히 고개를 숙인 것이 아니었다. 송과 힘을 합쳐 되갚을 길을 찾았다. 그러나 986년에 크게 진 송은 그럴 힘이 없었다. 거란은 이 판을 이미 읽고 있었을 것이다.
남주성 교수는 이 전쟁의 결과를 이렇게 정리했다. 거란은 형식적이나마 고려를 복속시켰고, 고려와 송의 외교를 끊었고, 송과 결전할 때 배후에서 고려가 기습할 걱정을 덜었다. "즉 고려는 실리를 얻었고 거란은 명분을 얻게 되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33)
10년 뒤, 거란은 송을 쳤다
등 뒤가 조용해지자 거란은 송을 향했다. 1004년 거란은 대군을 이끌고 송의 깊숙한 곳까지 내려갔다. 그해 겨울 두 나라는 '전연의 맹약'을 맺었다. 송은 해마다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거란에 보내기로 했다. (위키백과 「Chanyuan Treaty」)
거란이 강동6주를 내주고 얻은 것은 여진 땅 수백 리와 맞바꾼 등 뒤의 평화였다. 그리고 그 평화는 해마다 송에서 들어오는 은과 비단으로 바뀌었다.
지도 위에서 다시 보면
여기서 나는 한 가지를 묻고 싶다.
교과서대로 담판 전 고려의 국경이 청천강이었다면, 고려는 거란에게 얼마나 가까운 나라였을까. 거란의 수도 상경은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에 있었다. 청천강 남쪽의 고려는 거란에게 먼 나라였다.
물론 반론도 있다. 고려는 바다 건너 송과 손잡을 수 있었다. 국경이 남쪽에 있었어도 거란에게는 걸리는 나라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을 다시 읽으면 두 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 서희는 "거란의 동경에서 우리 안북부까지 수백 리"라고 했다.
- 소손녕은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넘어 송을 섬긴다"고 탓했다. (『고려사』 권94, 열전7 서희)
- 서희는 "그대 나라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 안에 있다"고 말했다.
- 담판 이듬해 거란의 글은 "두 나라의 국경이 서로 맞닿아 있다(境土相接)"고 했다. (『고려사』 권3, 성종 13년 2월)
![]() |
| 기록마다 다른 거란 동경의 위치들 |
『요사』 지리지는 요양이라 했다. 송나라 때 편찬된 『무경총요』는 의현(연군성)과 신민(요주)을, 증공의 『융평집』은 진황도(평주)를 가리킨다. 남주성 교수는 담판 당시 요양이 고려의 서경이었으므로, 동경은 진황도나 의현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52~157)
어느 기록을 따르든 거란 동경은 청천강에서 멀다. 청천강 남쪽의 고려와 국경을 맞댈 자리가 아니다.
거란은 곧 후회했다
송과의 문제가 정리되자 강동6주의 값어치가 달라졌다. 거란에게 그 땅은 이제 등 뒤를 막는 값이 아니라, 고려가 거란의 코앞까지 나와 있는 땅이 되었다.
1012년, 고려 현종이 병을 핑계로 입조하지 않자 거란 임금은 조서를 내렸다. "여섯 주의 땅을 다시 취하라(詔復取六州地)." (『요사』, 『압록과 고려의 북계』, 윤한택, 「고려 서북 국경에 대하여」, p.39 각주 62~64 재인용)
거란은 1010년과 1018년, 두 차례 더 고려에 크게 쳐들어왔다. 그리고 그 끝에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있었다.
글을 마치며
강동6주는 서희의 말솜씨만으로 얻은 땅이 아니었다. 거란은 송과의 큰 싸움을 앞두고 있었다. 등 뒤를 서둘러 정리해야 했다. 강동6주는 그 대가였다.
그렇다고 서희의 공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들 서경 이북을 떼어 주자고 할 때, 그는 거란이 무엇을 서두르고 있는지 보았다. 그리고 상대가 서두르는 그 순간을 붙잡아 자기 나라의 이익으로 바꾸었다. 서희의 힘은 말솜씨보다 정세를 읽는 눈에 있었다.
천 년 전 고려는 큰 나라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지금 우리도 다르지 않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서두르는지 보는 눈.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우선 서희가 가졌던 그 눈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글에서는 거란이 되찾으려 했던 그 땅에서 벌어진 싸움, 귀주대첩의 자리를 찾아보려 한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⑤ 귀주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몸철학 드림.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