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공민왕은 왜 요동을 쳤나?

지난 글 「⑧ 묘청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하편)」 끝에서 나는 물었다.
작은 나라는 자신들의 연호도 가질 수 없고,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정말 불가한 일인가?

그 물음의 답을 찾으려면 1370년의 압록강으로 가야 한다.

1370년 정월, 동북면의 장수 이성계가 기병 5천과 보병 1만을 이끌고 황초령을 넘었다.
600여 리를 가서 설한령에 이르렀고, 다시 700여 리를 가서 압록강을 건넜다. 그날 저녁 서북쪽 하늘에 자줏빛 기운이 가득했다. 하늘을 살피는 서운관은 "용맹한 장수의 기운"이라고 했다. 공민왕은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이성계를 보냈으니, 필히 그에 대한 응험이다.

(『고려사』 권42, 공민왕 19년 정월)

요동을 치러 압록강을 건넌 이 장수가, 18년 뒤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린 바로 그 이성계다.

공민왕은 왜 요동을 쳤을까? 그리고 고려는 그 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원나라 때 빼앗긴 땅

묘청의 난이 끝난 뒤 고려는 무신정변을 겪었다. 이어 몽골이 쳐들어왔다.
40년 가까이 싸운 끝에 고려는 원나라와 강화했다.

그 과정에서 북쪽 땅을 두 번 잃었다.

  • 동북쪽: 1258년 원나라는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두고 그 북쪽을 직접 다스렸다.
  • 서북쪽: 1269년 서경의 최탄 등이 서경과 여러 성을 들어 몽골에 항복했다. 몽골은 그곳에 동녕부를 두었다.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원나라의 정사 『원사』는 동녕로를 요양행성 아래에 두었다. 동녕부는 요양, 곧 요하 동쪽에 있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의현, pp.286~288)

땅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고려의 임금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해야 했다. 임금의 이름 앞에는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의 '충(忠)' 자가 붙었다. 고려는 자기 연호 대신 원나라의 연호를 썼다.

그 틈에서 원나라에 기대어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가장 큰 이가 기철이다. 그의 동생은 원나라 순제의 황후, 기황후였다. 공민왕은 뒤에 이렇게 말했다.

기철 등은 임금을 떨게 하는 위세를 믿고 나라의 법을 흔들었다. … 남에게 땅이 있으면 빼앗고, 남에게 사람이 있으면 빼앗았다.

(奇轍等憑震主之威 撓爲邦之法 … 人有土田則攘之 人有人民則奪之 — 『고려사』 권39, 공민왕 5년 6월)

1356년, 공민왕의 결단

1356년 5월, 공민왕은 기철과 그 무리를 모반으로 처형했다. 황후의 오빠를 죽인 것이다. 원나라의 눈치를 보던 임금이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같은 날 공민왕은 두 부대를 북쪽으로 보냈다. (『고려사』 권39, 공민왕 5년 5월)

  • 서북쪽: 장수 인당(印璫)을 서북면병마사로 삼아 "압록강 서쪽의 8참을 치게" 했다. 부사 가운데 한 사람이 최영이었다. (攻鴨江以西八站)
  • 동북쪽: 유인우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아 "쌍성 등의 땅을 되찾게" 했다. (收復雙城等地)

한 달 뒤, 인당은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 등 세 참을 격파했다. (印璫引兵渡鴨綠江 攻婆娑府等三站 破之 — 『고려사』 권39, 공민왕 5년 6월) 그해 여름 동북쪽에서는 쌍성총관부를 되찾았다. 빼앗긴 지 약 100년 만이었다.

눈여겨볼 사람이 있다. 그해 3월, 쌍성 땅의 고려인 세력가 이자춘이 개경에 왔다.
공민왕은 그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경은 돌아가 우리 백성을 진정시키고, 혹시 변이 있거든 내 명대로 하라." (『고려사』 권39, 공민왕 5년 3월) 이자춘은 "이성계의 아버지"다.

6월에는 원나라의 연호 '지정(至正)'을 그만 쓰게 했다. (停至正年號 — 같은 곳, 6월)

치고 나서 고개를 숙이다

원나라는 크게 노했다. 고려 사신을 가두고, 80만 군사로 치겠다고 협박했다.

공민왕은 한 걸음 물러섰다. 압록강을 건넌 것은 변방 관리들의 잘못이라고 했다. 그리고 원나라에 보낸 글을 이렇게 맺었다.

사천여 리의 우리 나라가 영원히 바다 가의 울타리가 될 것입니다.

(四千餘里 永爲薄海之藩 — 『고려사』 권39, 공민왕 5년 7월)

고개를 숙이는 글이다. 그런데 그 안에 고려의 크기가 들어 있다. 사천여 리다. 이덕일은 지금 교과서의 고려 강역이 이천여 리밖에 되지 않는다고 짚었다. 송나라 서긍은 1123년 『고려도경』에 고려 강역이 "서쪽으로 요수와 맞닿았다"고 썼다. (『도둑 맞은 한국사』, p.217)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원나라는 아직 강했다. 공민왕은 동북쪽 쌍성은 지켜 냈지만, 서북쪽 요동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 때는 14년 뒤에 왔다.

1370년, 두 차례의 요동 원정

1368년 중국에서 명나라가 일어났다. 원나라 황제는 대도를 버리고 북쪽 초원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요동은 주인이 없는 땅이 되었다.

1370년 명 태조가 공민왕에게 보낸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짐의 군대가 아직 요심(遼瀋)에 이르지 못했다." (朕兵未至遼瀋 — 『고려사』 권42, 공민왕 19년) 요양과 심양은 아직 명나라의 땅이 아니었다.

그 빈틈에 한 사람이 있었다. 기철의 아들 기새인첩목아다. 원나라에서 평장 벼슬을 지낸 그는 동녕부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가 처형된 것을 원망하며 고려 변경을 치려 했다. (『고려사』 권114, 지용수전)

첫 번째 원정: 우라산성

1370년 정월, 이성계가 압록강을 건넌다. 동녕부 동지 이오로첩목아는 우라산성으로 물러나 맞서려 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오자 갑옷을 벗고 두 번 절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고려 사람입니다.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

(吾先本高麗人 願爲臣僕 — 『고려사』 권42, 공민왕 19년 정월)

그는 300여 호를 이끌고 항복했다. 뒤에 이름을 이원경으로 바꿨다. 이 사람을 기억해 두자. 곧 다시 나온다.

성의 우두머리 고안위는 끝까지 버티었다. 마침 자기 활을 갖고 있지 않던 이성계는 수하의 활을 들고 편전을 쏘았다. 70여 발이 모두 적의 얼굴에 꽂혔다. 성 안의 기운이 꺾였다. 고안위는 처자식을 버리고 밤에 밧줄을 타고 달아났다.

여러 성이 잇따라 항복했다. 항복한 집이 1만 호가 넘었다. 이성계는 사로잡은 소 2천여 마리와 말 수백 필을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고려사』는 이렇게 적었다.

북쪽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여 돌아오는 자가 저자거리처럼 붐비었다. 동쪽으로는 황성, 북쪽으로는 동녕부, 서쪽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압록강까지 텅 비었다.

(北人大悅 歸者如市 東至皇城 北至東寧府 西至于海 南至鴨綠 爲之一空 — 같은 곳)

동녕부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고려로 돌아와, 황성에서 압록강까지 맞서는 세력이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두 번째 원정: 요성(요양)

그해 11월, 고려는 다시 군대를 보냈다. 서북면 상원수 지용수와 부원수 양백연, 임견미, 그리고 이성계였다. 시중 이인임은 도통사가 되어 안주에 주둔했다. 이번에는 동녕부의 중심, 요성(요양)이 목표였다. (『고려사』 권114, 지용수전)

의주에 이른 군대는 압록강에 부교를 놓았다. 말 서너 마리가 나란히 갈 수 있는 다리였다. 다리를 먼저 건넌 것은 이성계와 임견미였다. 군사들이 다투어 건너다 물에 빠져 죽는 이도 있었다. 모두 건너는 데 사흘이 걸렸다.

그날 저녁 천둥과 폭우가 쳤다. 군사들이 두려워했다. 병마사 이구가 말했다.

용이 움직이면 반드시 천둥과 비가 있습니다. 지금 상원수의 이름에 용(龍) 자가 들어 있는데, 강을 건너는 날 천둥과 비가 있으니 싸움에 이길 징조입니다.

(『고려사』 권114, 지용수전)

군사들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요성(요양)에서 이틀 거리인 나장탑에 이르자 짐을 두고 이레 치 양식만 지고 나아갔다.

화살과 설득

요성(요양)의 장수 처명은 용맹한 사람이었다. 끝까지 맞서 싸웠다. 이성계는 한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정월에 우라산성에서 항복한 이원경이었다.

"너를 죽이기는 아주 쉽다. 다만 살려서 쓰려는 것이니 어서 항복하라."

처명은 듣지 않았다. 이성계는 일부러 화살을 쏘아 그의 투구를 스치게 했다. 그래도 항복하지 않자 다리를 쏘았다. 처명은 화살을 맞고 물러났다가 다시 싸우러 나왔다. 이원경이 다시 말했다.

"네가 항복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네 얼굴을 쏠 것이다."

처명은 마침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했다. (『고려사』 권114, 지용수전)

성은 높고 험했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고 나무와 돌이 떨어졌다. 고려의 보병들은 그것을 무릅쓰고 성에 바짝 붙어 공격했다. 요성(요양)은 함락되었다. 기새인첩목아는 달아났고, 그와 한편이던 평장 김백안은 사로잡혔다.

돌아오는 길

승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성을 함락할 때 고려군이 성 안의 곳간을 거의 다 태워 버렸다. 군대는 먹을 것이 없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길은 꽁꽁 얼었다. 군사들은 소와 말을 잡아먹으며 돌아왔다.

원나라의 장수 나하추가 이틀 동안 뒤를 쫓았다.
그러나 고려군이 밤마다 들판에 변소와 마구간까지 반듯이 만들어 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군대의 행렬이 가지런하니 칠 수 없다." 그리고 물러갔다.

"요하 동쪽은 우리 강역"

이 원정에서 나는 싸움보다 더 눈여겨본 것이 있다.
고려가 요동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고려사』는 그 말을 세 번 적어 두었다.

하나, 요성(요양)으로 가는 길에서

군대가 나장탑에 이르자 지용수는 요양과 심양 사람들에게 이렇게 알렸다.

요심(요양과 심양)은 우리나라 경계이고 백성은 우리 백성이다. 지금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어루만져 안정시키려 한다.

(遼瀋是吾國界 民是吾民 今擧義兵撫安之 — 『고려사』 권114, 지용수전)

둘, 금주와 복주에 붙인 방문

요성(요양)을 함락한 뒤 고려군은 요동 반도 쪽의 금주·복주 등지에 방문을 붙였다.

본국은 요임금과 나란히 섰다.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며 땅을 주었는데, 서쪽으로 요하에 이르렀고 대대로 그 강역을 지켜 왔다. … 무릇 요하 동쪽, 본국 강역 안의 백성과 크고 작은 우두머리들은 서둘러 스스로 와서 조회하라. 함께 벼슬과 녹봉을 누리게 하겠다.

(本國與堯並立 周武王封箕子于朝鮮 而賜之履 西至于遼河 世守疆域 … 凡遼河以東 本國疆內之民 大小頭目等 速自來朝 共享爵祿)

요임금과 나란히 섰다는 것은 단군을 두고 한 말이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단군이 중국의 요임금 때에 나라를 열었다고 적었다. 고려는 단군에서 기자로 이어지는 역사를 근거로 "서쪽으로 요하까지"를 말했다.

셋, 동녕부에 보낸 외교 문서

한 달 뒤인 1370년 12월, 고려 조정의 도평의사사는 동녕부에 자문을 보냈다. 기새인첩목아를 잡아 보내라는 내용이다. 그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요심(요양과 심양)은 원래 본국의 옛 경계인데, 사대한 이래로 혼인을 맺어 사위와 장인의 사이가 되었기에 행성이 관할하도록 맡겨 두었다.

(遼瀋元係本國舊界 事大以來 結親甥舅 任爲行省管轄 — 『고려사』 권42, 공민왕 19년 12월)

이 한 문장이 이 글의 물음에 답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려는 요양과 심양을 남의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 원래 우리 땅인데, 원나라와 사돈 사이가 되어 잠시 맡겨 둔 땅이었다. 원나라가 물러간 지금, 맡겨 둔 땅을 찾으러 간 것이다.

요동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이듬해인 1371년, 원나라 요양행성의 평장 유익은 명나라에 항복하기 전에 먼저 고려에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고려는 그 까닭을 요동이 "본래 우리나라 땅"이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 요양이 어떤 곳이었는지는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에서 살폈다.
장수왕의 평양이었고, 고려의 서경이었다.
공민왕의 군대가 건너간 곳은 바로 우리의 땅, 요양이었다.

글을 마치며

공민왕은 왜 요동을 쳤을까? 기록을 따라가 보니 세 가지가 보인다.

  • 때가 왔다. 원나라는 북쪽으로 밀려났고, 명나라는 아직 요심에 이르지 못했다.
  • 위협이 있었다. 기철의 아들 기새인첩목아가 동녕부에서 고려를 노리고 있었다.
  • 무엇보다 그 땅은 우리 땅이었다. 고려는 "요심(요양과 심양)은 원래 본국의 옛 경계"라고 분명히 말했다.

물론 원정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 양식이 떨어져 돌아왔고, 요동을 다스릴 힘까지는 없었다. 1374년 공민왕이 죽자 요동은 다시 멀어졌다. 그 빈자리는 명나라가 채웠다.

그러나 이 원정은 하나를 남겼다. 고려가 요하 동쪽을 어떻게 여겼는지를 고려 자신의 목소리로 남겨 둔 것이다. 18년 뒤 우왕과 최영이 다시 요동을 치려 한 것도 이 생각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었다.

1370년 정월, 이성계는 황초령과 설한령을 넘어 1,300여 리를 걸어 압록강을 건넌다. 그해 겨울에는 부교를 가장 먼저 건너 요성(요양)을 떨어뜨렸다. 요동 땅을 가장 잘 아는 장수가 바로 이성계였다.

18년 뒤인 1388년, 그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불가하다"면서.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요동을 치던 장수가 요동 앞에서 돌아섰을까? 그 한가운데에 명나라가 세우려 한 철령위가 있다. 다음 글에서는 그 철령위가 어디였는지 따라가 보려 한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⑩ 철령위는 어디였나?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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