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귀주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지난 글 「④ 거란은 왜 강동6주를 내주었나?」에서 나는 거란의 자리에 서서 서희의 담판을 다시 보았다. 송과의 문제가 정리되자 거란은 강동6주를 되찾으려 했다. 거란은 1010년과 1018년, 두 차례 더 고려에 크게 쳐들어왔다.
귀주는 「③ 서희의 강동6주는 어디인가?」에서 따라간 서희의 여덟 성 가운데 하나다. 서희가 담판 이듬해인 994년에 쌓은 성이다.
그로부터 25년 뒤, 강감찬이 바로 그 귀주에서 거란군을 무찌렀다. 우리가 살수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3대 대첩이라 부르는 귀주대첩이다.
교과서는 귀주를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지난 글에서 서희의 성들이 요령성에 있었을 가능성을 살폈다. 그렇다면 귀주대첩의 자리도 다시 물어야 한다.
『고려사』가 적은 귀주대첩
1018년 12월, 거란이 세 번째로 쳐들어왔다.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맞섰다. 기병 1만 2천을 산골짜기에 숨기고, 쇠가죽을 큰 밧줄로 꼬아 성 동쪽의 큰 내를 막았다. 적이 오자 막은 물을 터뜨리고 복병을 내어 크게 이겼다. (『고려사』 권94, 열전7 강감찬)
거란군은 개경 가까이까지 내려왔다가 물러갔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개경은 어디였을까.
청나라의 고증은 『독사방여기요』를 인용해 이렇게 적었다. "개경은 곧 개주성(開州城)이다. 왕경(王京)의 서남쪽 200리에 있다. 이때 거란이 개경을 치자 왕은 평주로 달아났다." (開京 即開州城 在王京西南二百里 — 『압록과 고려의 북계』, 윤한택, 「고려 서북 국경에 대하여」, p.35 각주 재인용) 거란의 2차 침입(1010) 때를 두고 한 말이다.
나는 이 기록을 따른다. 거란군이 내려온 개경은 개주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 거란군은 돌아가는 길에 귀주를 지났다.
거란 군사가 귀주를 지나가자 강감찬 등이 동쪽 들에서 맞아 싸웠다. 두 군대가 맞서 승부가 나지 않았다.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우리 군사가 기세를 타고 내달아 치니 용기가 저절로 두 배가 되었다. 거란 군사가 달아나자 뒤쫓아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니 죽은 자가 들을 덮었다. …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다. 거란의 패배가 이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고려사』 권94, 열전7 강감찬 — 契丹兵過龜州 邯贊等邀戰於東郊 … 涉石川至于盤嶺 尸蔽野 … 生還者僅數千人 契丹之敗未有如此之甚)
『고려사』가 남긴 지명은 세 개다. 귀주, 석천, 반령. 그런데 석천과 반령이 어디인지는 어느 기록도 말해 주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 둔다. 『고려사』 강감찬전은 거란 장수를 '소손녕'이라고 적었지만, 『요사』는 이 전쟁의 장수를 소배압이라고 적었다.
『요사』가 적은 같은 싸움
진 쪽의 기록은 다르다. 『요사』는 이 싸움을 이렇게 적었다.
소배압 등이 고려와 다하(茶河)·타하(陀河) 두 강에서 싸웠다. 요군이 불리하여 천운·우피실 두 군에서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요련장 상온 아과달, 객성사 작고, 발해 상온 고청명, 천운군 상온 해리 등이 모두 죽었다.
(『요사』 권16, 성종본기 개태 7년 12월 —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68 재인용)
『요사』는 '귀주'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대신 두 강의 이름을 남겼다. 다하와 타하다. 거란의 정예인 우피실군 병사들이 이 강에 빠져 죽었다.
나는 이 두 강이 귀주대첩의 자리를 찾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강은 마을 이름처럼 쉽게 옮겨 가지 않기 때문이다.
다하와 타하는 어디를 흐르나
타하는 『요사』 지리지에 나온다.
귀덕주(貴德州)는 영원군인데 본래 한나라 양평현 땅이다. … 타하(陀河)와 대보산이 있다.
(『요사』 권38, 지리지 동경도 —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68 재인용)
그렇다면 귀덕주는 어디인가. 청나라가 편찬한 『성경강역고』는 "요의 귀덕주는 지금의 철령현 동남에 있다"고 했다. 요나라 귀덕주의 타하는 금나라 때 범하(范河)로 표기되었다. 남주성 교수는 다하(茶河)는 위치와 글자 모양으로 보아 철령의 시하(柴河)로 보인다고 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69~170)
시하와 범하는 지금도 요령성 철령을 흐른다. 두 강 모두 동쪽 산지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요하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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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령의 시하와 범하 (『압록과 고려의 북계』 p.171 [그림 5]) |
남주성 교수는 이를 근거로 "귀주 또한 철령현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지난 글의 표에서 그가 귀주를 '개원과 철령 사이'에 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70~171)
8년 전에도 거란은 '귀주'에서 무너졌다
귀주는 귀주대첩에만 나오지 않는다. 1010년 거란 성종이 직접 쳐들어온 2차 침입 때도 귀주가 나온다. 거란군이 돌아가는 길이었다.
통화 29년(1011) 봄 정월, 군사를 돌렸다. 항복했던 여러 성이 다시 배반하였다. 귀주(貴州) 남쪽 준령곡에 이르러 큰비가 여러 날 이어졌다. 말과 낙타가 모두 지쳤고 갑옷과 무기를 많이 버렸다.
(『요사』 권15, 성종본기 — 『압록과 고려의 북계』, 윤한택, 「고려 서북 국경에 대하여」, p.37 재인용)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있다. 청나라의 고증은 이 '귀주'를 『요사』 지리지의 '귀덕주'로 고쳤다. 『요사』 지리지에는 귀덕주는 있고 귀주는 없다는 것이다. (같은 책, p.37) 귀덕주는 앞에서 본 대로 철령 동남쪽이다.
거란의 기록에서 두 번의 패배가 모두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전투는 일어난 곳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 길과 강과 고개가 같기 때문이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복기대, 「압록과 고려의 북계를 마치며」, p.307)
200년 뒤의 귀주
귀주는 몽골 때에 다시 나온다. 1233년 고려의 홍복원은 서경·귀주 등 40여 성을 거느리고 몽골에 항복했다. 몽골은 항복한 고려인들을 요양과 심양 일대에 살게 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윤은숙, 「13~14세기 고려의 요동 인식」, p.257~258)
『원사』 지리지는 이 성들이 심양로에 들어갔다고 적었다. 심양로는 지금의 요령성 심양 일대다. (조하준, 「[고려 서경을 찾아서]」 연재, 굿모닝충청, 2025 — 『원사』·『신원사』 지리지 인용)
귀주가 정말 평안북도 구성이었다면, 그 땅이 왜 심양로에 편입되었을까. 철령은 심양 바로 북쪽이다.
교과서의 귀주는 어디서 왔나
귀주를 평북 구성으로 본 근거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은 귀성도호부가 본래 고려의 만년군이었는데, 성종 13년에 서희가 여진을 쫓고 성을 쌓아 귀주라 불렀다고 적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35)
지난 글에서 보았듯 이 비정은 조선 중기에 나왔다. 그리고 아직 답하지 못한 물음이 남는다.
- 『요사』가 적은 다하와 타하는 평안북도 어느 강인가.
- 2차 침입 때 거란이 무너진 '귀주'를 청나라는 왜 귀덕주로 고쳤는가.
- 귀주를 포함한 40여 성은 왜 심양로에 편입되었는가.
평북 구성으로는 이 세 물음에 답하기 어렵다. 철령으로는 세 물음이 한 자리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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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주와 철령현 그리고 개주 |
아직 열려 있는 것
솔직히 짚어 둘 것이 있다.
다하를 시하로 본 것은 남주성 교수의 추정이다. 근거는 위치와 글자 모양이다. 『고려사』가 적은 석천과 반령은 아직 찾지 못했다. 복기대 교수가 이끄는 인하대 연구단도 귀주대첩의 현장을 답사했지만, 확정이 아니라고 말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복기대, p.307)
확실한 것은 확실하게, 아직 열려 있는 것은 열려 있는 채로 두어야 한다. 다만 기록이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하다. 귀주대첩의 강은 서압록강, 곧 지금의 요하로 흘러들었다.
글을 마치며
귀주대첩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 군사는 수천 명뿐이었다. 거란은 이후 다시는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오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싸움이 어디에서 벌어졌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거란 사람들은 자기 병사들이 빠져 죽은 강의 이름을 적어 두었다. 다하와 타하다. 그 강은 지금도 요동의 철령현에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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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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