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윤관의 동북9성은 어디에 있었나?

지난 글 세 편에서 나는 고려의 서북 국경을 말하였다. 

평양은 지금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요양이고, 압록강은 지금 북한의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이고, 천리장성은 의주와 동해안 도련포를 잇는 험준한 산악 지대에 쌓은 장성이 아니라 요령성 평야지대에 있었다. 

이번엔 방향을 바꾸어 고려의 동북 국경, 윤관이 여진을 몰아내고 세웠다는 9성 이야기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고려의 북방 경계선 전체를 그려볼 예정이다.

동북9성 위치에 대한 두 가지 학설

동북9성은 1107년, 고려 예종의 명을 받은 윤관과 오연총이 여진을 정벌하고 세운 것이다. 

문제는 그 9성이, 특히 가장 북쪽 경계였던 공험진과 선춘령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가이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에 실린 이인철(경복대학교 교수)의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의 위치 연구」(선도문화 제23권, 2017.8.30 게재)는 이 문제를 두고 엇갈려 온 학설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 중 두 갈래, 함흥평야설과 두만강 이북설을 살펴본다.

함흥평야설은 조선총독부에서 나왔다

지금 교과서가 그리는 동북 9성, 함흥평야 일대라는 위치 비정은 어디서 왔을까.
책은 그 출처를 분명히 적어놓았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가 1932년 펴낸 『조선사(朝鮮史)』다.

[조선사편수회는] 1932년에 간행한 『조선사(朝鮮史)』에서도 동북9성의 위치를 두만강 이남 함경도 남부의 지명들로 확정하여 표기하였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p.87, 각주 6: 朝鮮史編修會 編, 1932, 「朝鮮史」 第3編2卷, 朝鮮總督府, p.186, p.191, p.195)

「고려사」 가 말하는 동북9성

두 번째가 두만강 이북설이다. 이 학설은 「고려사」 원문에서 출발한다.

고려 태조는 신라에게서 항복받고 백제를 멸한 고구려의 땅으로부터 일어나 도읍을 개경으로 하였다. 서북은 당나라 이후로 압록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서북은 고구려의 지역에 못 미쳤으나, 동북은 고구려 영토보다 더하였다. 원문: 高麗太祖 興於高句麗之地 降新羅滅百濟 定都開京. 其四履 西北自唐以來 以鴨綠爲限 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 蓋西北四至 不及高句麗 而東北過之 (『압록과 고려의 북계』, 「高麗史」 권58 「지리지」 서문 인용, p.96 [표1] ①; 같은 원문이 p.185에도 재인용됨)

같은 「지리지」의 동계(東界) 조에는 9성 설치의 구체적인 경위도 나온다.

예종 2년(1107년)에 평장사 윤관을 원수로 삼고, 지추밀원사 오연총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도록 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9성을 설치했으며, 공험진의 선춘령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高麗史」 권58 「지리지」 東界, p.96 [표1] ②)

압록강과 선춘령, 이 두 지명이 나란히 고려의 서북과 동북 경계로 적혀 있다. 

윤관이 9성을 정벌할 때 동원한 군사는 17만 대군이었다

18세기 실학자 이익은 이미 선춘령의 위치를 계산해둔 바 있다.

윤관의 비는 선춘령에 있으니 두만강 북쪽 7백리 되는 곳이다. (이익, 「성호사설」 제2권 「천지문」 〈윤관비〉; 『압록과 고려의 북계』, p.94 각주16 재인용)

1977년 김구진은 병력과 이주민 규모를 근거로 이 계산을 뒷받침했다. 

세종 때 6진을 개척할 때 동원한 군사는 함길도 토착 군정 6천 명 정도였고, 이주시킨 백성은 4차에 걸쳐 2,800~3,200호였다. 반면 윤관이 9성을 정벌할 때 동원한 군사는 전국에서 징발한 17만 대군이었고, 이주시킨 백성은 2차에 걸쳐 75,000호였다. 책은 이 비교를 이렇게 정리한다.

두 가지 사실을 비교해볼 때 윤관이 정벌한 동북9성의 범위는 세종 때 개척한 6진의 범위보다 훨씬 더 넓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의 범위는 여말선초의 관찬사료나 지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두만강 이북 7백리까지 확대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김구진, 1977, 「윤관 9성의 범위와 조선 6진의 개척」, 『사총』 21·22 합집,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압록과 고려의 북계』, p.94)

6진을 지킨 병력의 스물여덟 배에 가까운 군사가, 6진보다 좁은 함흥평야 일대를 정벌하러 갔다는 것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는가? 동북9성이 함흥평야 일대라는 조선사편수회의 주장은 이렇게 앞 뒤가 맞지 않는다.

명나라와 조선도 인정한 국경

두만강 이북설의 근거는 실학자의 계산에서 그치지 않는다. 

명나라와 조선 두 나라가 공식 문서로 주고받은 기록에도 같은 경계선이 나온다. 

1404년 『태종실록』에는 조선이 명나라 조정에 올린 주본(奏本)이 실려 있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공주·길주·단주·영주·웅주·함주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태종실록』 7권, 4년(1404) 5월 19일; 『압록과 고려의 북계』, p.96 [표1] ⑤)

이듬해인 1405년 『태종실록』에는, 명 태조 고황제가 홍무 21년(1388)에 내린 성지의 내용이 다시 확인된다.

홍무 21년에 태조 고황제의 성지를 받자와, '공험진 이북은 요동으로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그대로 본국에 붙여 달라.'고 청하기 위하여... (『태종실록』 9권, 5년(1405) 5월 16일; 『압록과 고려의 북계』, p.97 [표1] ⑥)

1433년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신하들에게 한 말이 실려 있다. 명 고황제가 조선의 지도를 보고 내린 조서를 인용하는 대목이다.

고려의 윤관은 17만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소탕하여 주진을 개척해 두었으므로, 여진이 지금까지 모두 우리나라의 위엄을 칭찬하니, 그 공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다... [명나라] 고황제가 조선의 지도를 보고 조서하기를,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경계라.'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 (『세종실록』 59권, 15년(1433) 3월 20일; 『압록과 고려의 북계』, p.97 [표1] ⑦)

윤관의 9성 정벌은 여진에게도, 명나라에게도, 조선 스스로에게도 "공험진 이남"이라는 하나의 기준점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 공험진이 두만강 이남 함흥평야가 아니라 두만강을 훌쩍 넘어선 자리였다는 것은 여러 기록들이 합리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되찾은 고려의 북방 국경선

이 책에는 서북계와 동북계를 한 장에 담은 지도가 있다. 

박시현·복기대의 「「고려도경」「허항종행정록」「금사」에 기록된 고려의 서북계에 대한 시론」 끝부분에 실린 [지도 8]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 영역이다.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의 영토
지도의 서쪽에는 거란과 고려의 경계가, 심양·요양 일대를 가로지르는 천리장성과 함께 그려져 있다. 지도의 동북쪽에는 윤관의 9성이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평양도, 압록강도, 천리장성도, 공험진과 선춘령도, 지금까지 네 편에 걸쳐 하나씩 따로 확인해온 지점들이, 이 지도 한 장 위에서 비로소 하나의 국경선이 된 것이다.

글을 마치며

교과서 지도는 고려를 한반도 안에 웅크린 나라로 그린다. 

그런데 『압록과 고려의 북계』가 설명하는 고려는, 서쪽으로는 요하 근처까지, 동북쪽으로는 두만강을 훌쩍 넘어선 나라였다. 「고려사」가 스스로 적어놓은 경계이고, 명나라와 조선이 문서로 주고받으며 재확인한 경계다.

지금까지 고려의 국경에 대한 네 편의 글을 쓰며, 나는 같은 질문을 계속 던졌다.
우리가 배운 그 지명이, 정말 그 자리였을까?  답은 매번 '그렇지 않았다'.

이제야 나는 나의 오랜 의문들을 풀고 고려의 영토를 되찾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문득 고려의 영토가 이렇다면 통일신라의 영토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을까? 혹시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영토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을까? 혹시 고조선의 영토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을까? 하나의 문제를 풀면 두개의 질문이 나오고 두개의 질문을 풀면 갑자기 열개의 질문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나라의 고대사가 아닌가 한다. 나는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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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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