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묘청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상편)
지난 글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에서 나는 고려의 서경이 지금의 요양이었다고 썼다.
이번 글은 그 서경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1135년 정월, 서경의 승려 묘청이 군사를 일으켰다. 서경에 와 있던 개경 관원들을 붙잡아 소금 창고에 가두었다. 개경 사람이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두었다. 군사를 보내 개경으로 가는 고갯길을 끊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했다. 하늘이 열렸다는 뜻이다. 군대는 '하늘이 보낸 충의군',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불렀다.
신채호는 이 사건을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불렀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을 '묘청의 난'이라는 이름으로만 기억한다. 교과서에는 몇 줄 나올 뿐이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갖고 있었다.
- 묘청은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개경 쪽과 무엇이 어떻게 달랐나?
- 묘청은 왜 반란까지 일으켜야 했나?
- 반란이 끝난 뒤 고려는 어떻게 바뀌었나?
이 질문을 가지고 나는 답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부모의 나라에서 신하의 나라로
묘청을 이해하려면 먼저 1126년 봄의 개경을 봐야 한다.
여진은 오랫동안 고려를 섬기던 사람들이었다.
신채호는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에 "여진은 고려를 종이 주인 섬기듯 했다(女眞奴事高麗)"는 말이 있고, 『고려사』에 실린 여진의 국서에도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긴다"는 말이 있다고 적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총론, 번역본 p.71)
그 여진이 1115년 금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고려와의 관계를 두 번 뒤집었다.
첫 번째는 1117년이다. 금나라 임금 아골타가 고려에 글을 보냈다.
형인 대여진 금국 황제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우리 조상 때부터 한쪽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큰 나라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겨 조심스럽게 섬겼다. … 왕께서 화친을 허락하여 형제가 되어, 대대로 끝없는 우호를 이루기 바란다.
(兄大女眞金國皇帝 致書于弟高麗國王 … 高麗爲父母之邦 小心事之 … 惟王許我和親 結爲兄弟 — 『고려사』 권14, 예종 12년 3월)
금나라 스스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다고 적었다. 그 글에서 이제는 금이 형이 되고 고려가 아우가 되자고 했다. 부모와 자식의 자리가 형과 아우의 자리로 바뀐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여러 신하가 반대했지만, 김부식의 아우 김부철이 금과의 화친을 받아들이자고 앞장섰다.
두 번째는 1125년이다. 이 해에 금은 거란을 멸했다. 이제 금은 형으로도 만족하지 않았다. 임금이 되려 했다. 고려에게 신하가 되라는 것이었다.
그해 5월, 금은 고려가 보낸 국서를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까닭은 두 가지였다.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 표(表)가 아니었고, 글 속에서 고려 임금이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金以國書非表又不稱臣不納 — 『고려사』 권15, 인종 3년 5월)
정리하면 이렇다.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다. 1117년에는 형이 되겠다고 했다. 1125년에는 임금이 되겠다고 했다.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이듬해 개경에서 더 큰 일이 일어났다. 1126년 2월, 외척 이자겸과 척준경이 군사를 일으켜 궁궐에 쳐들어왔다. 그리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인종은 이자겸의 집으로 끌려 갔다.
한 달 뒤, 금나라를 섬길지를 두고 백관이 모였다. 모두 "안 된다"고 했다. 이자겸과 척준경만 다르게 말했다.
금은 옛날 작은 나라여서 요와 우리를 섬겼다. 그런데 지금은 갑자기 일어나 요와 송을 멸하고, 정치가 닦이고 병력이 강하여 날로 강대해지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섬기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도다(以小事大先王之道).
(『고려사』 권15, 인종 4년 3월)
조정은 이자겸의 말을 따랐다. 4월, 고려는 금에 사신을 보내 신하를 칭하는 표를 올렸다. 그 사흘 전, 인종은 안화사에 갔다가 불탄 옛 궁궐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이 해 여름 인종은 이자겸을 몰아냈다. 그러나 왕의 권위는 이미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궁궐은 타 버렸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여진은 고려의 임금이 되었다. 묘청은 바로 이 폐허 위에 나타났다.
서경의 세 성인
묘청은 서경의 승려였다. 뒤에 이름을 정심(淨心)으로 바꿨다. 하늘의 조짐을 읽는 일관 백수한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서경 사람 정지상이 그 말을 깊이 믿었다. 정지상은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했고, 시로 이름이 높았다.
1128년, 정지상이 말했다.
개경은 이미 왕업이 쇠하여 궁궐이 모두 불타 남은 것이 없다. 서경에는 왕기(王氣)가 있으니 임금을 옮겨 상경(上京)으로 삼아야 한다.
(『고려사』 권127, 묘청전)
묘청은 서경 임원역의 땅을 가리켰다. 음양가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라는 것이다. 여기에 궁궐을 짓고 옮겨 가면 "천하를 아우르고, 금이 예물을 들고 스스로 항복해 오며,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이라고 했다.
10년 만에 부모의 나라에서 신하가 되어 버린 고려에서, 이 말은 큰 힘을 가졌다.
왕과 가까운 신하들과 대신 몇 사람이 묘청을 "성인"이라 불렀다. 묘청을 따르자는 글에 관리들의 서명을 받았다. 서명하지 않은 사람은 셋뿐이었다. 김부식, 임원애, 이지저다.
인종은 임원역에 궁궐을 짓게 했다. 1129년 새 궁궐 대화궁이 완성되었다.
하늘의 풍악과 불탄 탑
『고려사』 묘청전에는 기이한 일들이 많이 실려 있다.
나는 조선 초기에 지어진 『고려사』에 나온 하기 내용들은 사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기록된 내용들로 정말 그런 일들이 있었는지 혹은 그 내용의 전후 맥락이 쓰여진 대로 일어났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다. 다만, 아래 내용을 여기서 소개하는 이유는 묘청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여 당시의 분위기를 가늠하는데 참고하라는 취지임을 밝혀 둔다.
인종이 대화궁 건룡전에서 하례를 받던 날, 묘청 등이 말했다. 공중에서 풍악 소리가 들리니 상서로운 징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재상들은 하례 표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우리가 비록 늙었으나 아직 귀머거리는 아니다. 공중의 풍악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늘은 속일 수 없다.
이듬해 서경 중흥사의 탑이 불타자 누군가 묘청에게 따졌다. 재앙을 누르려고 임금을 서경으로 모셔 왔는데 왜 이런 큰 재앙이 생겼느냐는 것이다. 묘청은 얼굴이 붉어져 한참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주먹을 휘두르며 말했다. "주상께서 개경에 계셨다면 재앙이 이보다 더 컸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묘청의 허물을 말하는 위의 내용들이 백성의 입장에서는 무슨 죄인가? 하는생각이 든다. 당시에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는 권세가들의 악행을 생각해 보면, 이 내용들에서 묘청 개인의 사리사욕이나 백성들에게 악행을 행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백두산의 선인을 모시다
묘청은 대화궁 안에 팔성당(八聖堂)을 세웠다. 여덟 성인의 화상을 그려 모신 전각이다. 첫째가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넷째가 '구려 평양선인'이다.
백두산이 맨 앞에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평양이 있다. 이덕일은 이 '구려 평양선인'의 선인이 단군을 뜻한다고 본다. 『삼국사기』 동천왕조의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곳(宅)"이라는 구절과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묘청이 꿈꾼 나라의 뿌리는 유교가 아니라 단군과 고구려에 있었다.
금암역의 폭풍과 대동강의 기름떡
1132년 인종이 다시 서경으로 가던 길이었다. 금암역에서 비바람이 몰아쳤다. 대낮인데도 하늘이 캄캄해졌다. 왕은 길을 잃고 진흙탕에 빠졌다. 저녁에는 진눈깨비가 내려 사람과 말과 낙타가 많이 죽었다. 묘청은 비의 신 우사와 바람의 신 풍백에게 허락을 받았는데 "식언을 하다니 가증스럽다"고 했다.
묘청 일파는 또 큰 떡에 구멍을 뚫고 기름을 넣어 대동강에 가라앉혔다고 한다. 물 위로 번진 기름이 오색으로 빛나자 신룡이 침을 토한 상서라고 했다. 잠수부가 떡을 건져 내면서 속임수가 드러났다.
여기서 짚어 둘 것이 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고려사』의 '반역전'에 실려 있다. 이긴 쪽이 묘청을 요사스러운 승려로 그리려고 고른 장면들이다.
그런데도 감추지 못한 사실이 있다. 임원애가 묘청을 저잣거리에서 처형하라고 상소했지만 인종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옷을 서경으로 보내 자신이 있는 것처럼 법사를 열게 했다. 1134년에는 묘청에게 삼중대통 지누각원사라는 벼슬과 붉은 관복을 내렸다. 임금은 끝까지 묘청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개경과 서경은 무엇이 달랐나
두 쪽이 부딪힌 것은 도읍만이 아니었다.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두고 부딪혔다.
| 서경 쪽 (묘청·정지상) | 개경 쪽 (김부식·임원애·이지저) | |
|---|---|---|
| 금나라 | 칭제건원, 금 정벌 | 사대로 평화를 지킴 |
| 도읍 | 서경 천도 | 개경 유지 |
| 생각의 뿌리 | 풍수·도참, 팔성당의 선인 | 유교 |
| 기반 | 서경 사람들, 왕의 근신 | 개경의 문벌 귀족 |
첫째 다른 점은 금나라를 대하는 태도였다. 묘청 쪽은 임금을 황제로 부르고 연호를 세우자고 했다. 칭제건원(稱帝建元)이다. 유제(劉齊)와 손잡고 금을 협공해 멸하자고도 했다. 서경 원로 50인이 칭제건원을 청하자 정지상은 "위로는 하늘의 뜻에 응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바람을 따라 금을 누르소서"라고 했다. (『고려사』 권127, 묘청전)
개경 쪽 이지저의 답은 짧았다. "금은 강적이니 가벼이 할 수 없다." 금과의 외교는 처음부터 김부식 형제의 노선이었다. 금이 강해질수록 김부식의 자리도 높아졌다.
둘째는 도읍이다. 천도는 단지 궁궐을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개경에 뿌리내린 문벌 귀족의 땅과 인맥을 떠난다는 뜻이었다. 이자겸이 왕을 겁박할 때 개경의 문벌 귀족 대부분은 방관했다. 인종은 이것에 불만을 품고 서경 세력에 눈을 돌렸다. (이덕일, 『이덕일의 한국통사』, pp.247~248)
셋째는 생각의 뿌리다. 신채호는 이 싸움을 이렇게 요약했다.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다.
그런데 선이 그렇게 깔끔하게 그어지지는 않는다. 윤관의 아들 윤언이가 그렇다. 그는 서경 천도에는 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연호를 세우자고 청했다. 뒤에 그는 이렇게 변론했다.
연호를 세우자는 청은 임금을 높이려는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왕조에는 태조와 광종의 고사가 있습니다. 지난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와 발해도 그렇게 했지만, 큰 나라가 군사를 보낸 적이 없고 작은 나라가 그르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칭제건원은 묘청 한 사람의 괴상한 주장이 아니었다. 윤관의 아들인 윤언이도 같은 생각을 했다. 고려 태조와 광종이 실제로 했던 일이기도 했다.
왜 반란까지 갔나
1134년, 대화궁 30여 곳에 벼락이 떨어졌다. 인종은 묘청의 말에 따라 다시 서경으로 가서 재앙을 피하려 했다. 김부식이 막았다.
길한 땅이라면 하늘이 이렇게 하겠습니까. 여기서 재앙을 피한다니 어긋난 일이 아닙니까. 게다가 가을걷이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수레가 나가면 반드시 곡식을 짓밟을 것입니다.
인종은 "말이 지극히 옳다. 서쪽으로 가지 않겠다"고 답했다.
묘청에게 이 말은 사형 선고와 같았다. 6년 동안 쌓아 온 천도의 길이 막혔다. 왕의 마음이 떠나면, 임원애가 올렸던 상소처럼 저잣거리의 처형이 기다릴 수도 있었다.
위의 내용을 다시 읽으면, 임금인 인종은 서경으로 가려 하는데 김부식 세력이 왕을 막은 것이다. 그리고 묘청은 왕을 구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아닐까? 이것은 단지, 나의 생각이다.
글을 마치며
이번 글에서는 첫 번째 물음을 따라갔다.
묘청의 서경과 김부식의 개경은 금나라를 대하는 태도와 그 대응 방식에서 갈라섰다.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1134년, 왕은 서경으로 가지 않겠다고 했다.
6년을 기다린 묘청에게 남은 길은 무엇이었을까.
다음 글에서는 나머지 두 물음을 따라가 보려 한다.
묘청은 왜 반란까지 일으켜야 했나?
반란이 끝난 뒤 고려는 어떻게 바뀌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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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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