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지난 글 「⑤ 귀주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까지 세 편에 걸쳐 나는 서희의 강동6주와 귀주대첩의 자리를 따라갔다. 그런데 그 세 편에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었다.
고려의 서경은 지금의 요령성 요양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전제를 당연한 것처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정면으로 따져 본 적은 없다.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교과서가 말하는 서경
교과서는 고려의 서경을 지금 북한의 평양이라고 가르친다. 근거는 『고려사』 지리지다. 『고려사』는 서경을 '서경유수관 평양부'라 하고, 본래 고구려 장수왕이 도읍한 평양이라고 적었다. (『고려사』 권58, 지리지 북계 서경유수관 평양부)
여기까지는 다툴 것이 없다. 고려의 서경은 고구려의 평양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교과서는 고구려의 평양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라고 본다. 그래서 고려의 서경도 지금 북한의 평양이 된다.
나는 「③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어디인가?」에서 그 평양이 지금의 요양이라고 썼다. 그렇다면 고려의 서경도 요양이어야 한다. 이번에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고려시대의 기록으로 이것을 확인해 보려 한다.
고려의 서경을 차지한 나라의 기록
1269년 서경의 최탄 등이 북계의 60여 성을 들어 몽골에 항복했다. 몽골은 서경에 동녕부를 두었다. 고려의 서경을 20년 가까이 직접 다스린 나라가 바로 원나라다. 그 원나라의 정사 『원사』 지리지는 동녕로를 이렇게 적었다.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성을 함락한 이후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겨갔다. 압록수 동남 천여 리에 있는 것은 옛 평양이 아니다. 왕건에 이르러 평양을 서경으로 하였다. … 8년(1271) 서경을 동녕부로 고쳤다.
(『원사』 지리지 동녕로 — 『압록과 고려의 북계』, p.146 재인용)
이 기록은 세 가지를 한꺼번에 말한다. 동녕로는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다. 그곳이 고려의 서경이었다. 그리고 "압록수 동남 천여 리에 있는 것", 곧 지금 우리가 평양이라고 부르는 그 자리는 옛 평양이 아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평양성은 어디였나. 거란의 정사 『요사』 지리지가 답한다.
동경 요양부는 … 원위의 태무제가 그 왕 고련(장수왕)이 사는 평양성에 사신을 보냈는데, 요나라 동경이 본래 이곳이다.
(『요사』 권38, 지리지 동경도 — 『압록과 고려의 북계』, p.146 재인용)
요나라의 동경 요양부는 지금의 요령성 요양이다. 두 나라의 정사를 이으면 이렇게 된다. 장수왕의 평양성은 요양이다. 왕건은 그 평양을 서경으로 삼았다. 고려의 서경은 요양이다.
남주성 교수도 같은 결론에 이른다. 그는 거란이 쌓은 동경의 자리를 따지면서, 담판 무렵 "요양은 고려의 서경으로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거란의 동경은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57) 「④ 거란은 왜 강동6주를 내주었나?」에서 본 '기록마다 다른 거란 동경의 자리'는 바로 이 때문에 생긴 문제다.
조위총이 금나라에 바치려 한 땅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맞서 난을 일으켰다. 서경에 딸린 40여 성이 호응했다. 힘이 다하자 조위총은 그 땅을 금나라에 바치겠다고 했다. 『금사』는 이렇게 적었다.
고려의 서경유수 조위총이 그 임금을 배반하고, 자비령 서쪽과 압록강 동쪽의 40여 성을 들어 내부하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請以慈悲嶺以西鴨淥江以東四十餘城內附 不納)
(『금사』 권7, 세종본기 — 조하준, 「[고려 서경을 찾아서 ③]」, 굿모닝충청, 2025 재인용)
서경의 땅은 '자비령 서쪽, 압록강 동쪽'이었다. 교과서대로 자비령이 황해도에 있고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이라면 방위가 맞지 않는다. 지금의 평양은 자비령의 북쪽, 압록강의 남쪽에 있다. 황해도 자비령의 서쪽은 바다다.
복기대 교수도 같은 점을 짚었다. 황해도 자비령의 서쪽을 바치겠다는 것은 고려의 도읍 개경을 둘러싼 바다를 바치겠다는 말과 같아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또 압록강 동쪽의 땅이 모두 금나라에 속해 있었다면 어디에 40개의 성이 남아 있었겠느냐고 물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복기대, p.221)
눈여겨볼 글자가 있다. 『금사』는 이 강을 '鴨淥江', 곧 삼수변의 압록강으로 적었다. 내가 「③ 서희의 강동6주는 어디인가?」에서 서압록강이라고 부른 강, 곧 지금의 요하다. 서경의 40여 성은 요하의 동쪽에 있었다. 요양은 요하의 동쪽에 있다.
1388년, 평양과 서경은 따로 있었다
고려 말, 우왕은 요동 정벌을 준비했다. 『고려사』는 그해 4월의 일을 이렇게 적었다.
우왕이 평양에 머물며 여러 도의 군사 징발을 독촉하고, 압록강에 부교를 놓게 하였다. … 임견미·염흥방의 재산을 배로 서경에 실어 보내 군사들의 상금으로 쓰려 하였다. (禑次平壤 … 作浮橋于鴨綠江 … 船運林廉等家財于西京)
(『고려사』 권137, 열전50 신우 — 조하준, 「[고려 서경을 찾아서 ④]」, 굿모닝충청, 2025 재인용)
한 문장 안에 '평양'과 '서경'이 따로 나온다. 우왕은 평양에 머물며 군사를 모았고, 군자금은 배로 서경에 보냈다. 두 곳이 같은 곳이었다면 이렇게 적을 까닭이 없다. 적어도 이때의 서경은 지금의 평양과 다른 곳이었다.
'서경'이라는 이름의 방위
이름에도 단서가 있다. 『자치통감』은 왕건이 즉위해 개경을 동경으로, 평양을 서경으로 삼았다고 적었다. 이덕일 역사학자는 여기서 물음을 던졌다. 지금의 개성이 동경이라면 지금의 평양은 방위상 '북경'이어야 한다. '서경'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서경이 요령성 요양이라는 주장은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이덕일, 『이덕일의 한국통사』, p.227~228)
지도를 펼치면 그 뜻이 보인다. 지금의 평양은 개성의 거의 정북쪽에 있다. 요양은 개성에서 보면 서북쪽이다.
서희의 말도 다시 읽힌다. 서희는 소손녕에게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 땅의 경계를 따진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 안에 있다"고 했다. (『고려사』 권94, 열전7 서희) 고려의 도읍은 개경이었는데 서희는 "평양에 도읍하였다"고 말했다. 나는 이것을 두 번째 도읍인 서경 평양을 두고 한 말로 읽는다. 그 서경이 요양이었다면, 거란의 동경 요양부가 고려 땅 안에 있다는 서희의 말은 빈말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이 된다.
글을 마치며
고려의 서경을 두고 세 나라가 기록을 남겼다. 거란은 장수왕의 평양이 자기들의 동경 요양부라고 적었다. 금나라는 서경의 땅이 압록강(鴨淥江) 동쪽이라고 적었다. 원나라는 서경을 직접 다스리며, 지금의 평양 자리는 옛 평양이 아니라고 적었다.
세 기록은 한 곳을 가리킨다. 고려의 서경은 요하의 동쪽, 지금의 요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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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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