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천리장성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전 글에서 소개한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과 고대 압록강의 위치 이외에, 학창 시절부터 나를 의아하게 만드는 질문이 하나 더 있었다.

교과서는 고려가 거란을 막기 위해 덕종과 정종 때(1033~1044) 압록강가 의주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천여 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그 천리장성이 지나간다는 땅을 지도에서 찾아보면, 평안북도의 낭림산맥과 적유령산맥을 지난다.

(참고로, 두 산맥의 평균 고도는 800~1,500미터, 낭림산맥의 최고봉 와갈봉은 2,260미터, 적유령산맥의 최고봉 숭덕산은 1,994미터다.)

장수왕이 옮긴 평양의 위치에 의구심을 품었던 것처럼, 나는 이 대목에서도 같은 의문을 가졌다.
굳이 그렇게 높고 험한 산 위에 천 리가 넘는 장성을 쌓아야 했을까?
높고 험한 산은 그 자체가 이미 방어선이 아닌가?

우리가 알고 있는 천리장성

먼저 지금 교과서와 백과사전은 천리장성을 대체로 이렇게 설명한다.

덕종 2년(1033) 평장사 유소(柳韶)의 주도로 축성이 시작되어 정종 10년(1044)경 완성되었다.
서쪽은 압록강 옆 인주(麟州), 동쪽은 정평 해안인 도련포까지. 길이는 천여 리(里), 높이와 폭은 각 25척(尺)의 석축. 거란과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 설명을 지도 위에 그대로 옮기면, 서쪽 의주에서 동쪽 함경남도 정평 해안까지 평안도와 함경도의 산줄기를 가로지르는 선이 그려진다. 내가 학생 때 배운 그 선이고 지금도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그 선이다. 그런데 지금도 이해하기 힘든 것은, 천리장성은 거란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인데 아래 지도는 당시 고려를 섬기던 여진을 막는 성이 아닌가?

우리가 배운 천리장성 위치

그런데, 정작 『고려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고려사』의 두 기록

『고려사』에는 천리장성을 쌓은 기록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장성을 쌓은 유소의 열전이고, 다른 하나는 나라의 성 쌓기를 적은 병지(兵志)다. 먼저 『압록과 고려의 북계』가 소개한 열전이다.

덕종 2년(1033), 유소(柳韶)가 북경관방(北境關防, 천리장성을 말함)을 비로소 설치하였다. 서해(西海) 바닷가 예전 국내성(國內城) 경계 압강(鴨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흥화·정주·영해·영덕·영삭·운주·안수·청새·평로·영원·정융·맹주·삭주 등 13 성곽을 넘어 요덕·정변·화주 등 3 성곽에 이르렀다.

(『고려사』 권94 열전7 유소 — 『압록과 고려의 북계』, 윤한택, 「고려 서북 국경에 대하여」, p.43)

병지에는 같은 일이 조금 더 자세히 적혀 있다.

서해 바닷가 옛 국내성 경계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13성을 넘어 요덕·정변·화주 3성에 이르렀다. 동쪽으로 바다에 닿으니 뻗친 길이가 천여 리였다. 돌로 성을 쌓았으며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이었다. (東傅于海 延袤千餘里 以石爲城 高厚各二十五尺)

(『고려사』 권82 지36 병2 성보)

두 기록은 3성에 이르기까지는 같다. 시작점을 열전은 "압강(鴨江)", 병지는 "압록강(鴨綠江)"이라고 적었을 뿐이다. 압강은 압록강을 줄여 부른 말이다. 『고려사』는 위화도 회군 때도 같은 강을 한 번은 "압록강을 건너", 엿새 뒤에는 "압강을 건너"라고 적었다. (『고려사』 권137, 신우 14년 5월)

다른 것은 3성 다음이다. 열전은 거기서 끝나고, 병지는 "동쪽으로 바다에 닿았다"와 "천여 리", "돌로 쌓았다"를 덧붙였다. "천리장성"이라는 이름도 이 "천여 리"에서 나왔다.

중요한 것은 시작점이다. 두 기록 모두 장성이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이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앞서 다룬 글에서 밝힌 바와 같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의 저자는 강동6주와 북경관방(천리장성)이 모두 국경선 압록강을 기준으로 함께 이동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기존에 후방 방어선인 북한의 압록강(鴨綠江) 아래쪽으로 비정되어 왔던 강동 6주, 북경장성(천리장성), 서경 등이 모두 고려의 국경선 압록강(鴨淥江)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윤한택, p.13)

고구려도 천리장성을 쌓았다

천여 리에 이르는 장성은 고려가 처음 쌓은 것이 아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장성을 이렇게 적었다.

영류왕 14년(631) 봄 2월, 왕이 무리를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다. 동북쪽 부여성에서 시작하여 바다에 이르기까지 천여 리였다. 모두 16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류왕 14년)

이 공사는 뒤에 연개소문이 감독하였다. (『삼국사기』 권20 영류왕 25년)

고구려 장성의 한쪽 끝은 부여성이다. 남주성은 강동6주의 하나인 용주를 황룡부로 보고, 황룡부가 "본래 발해 부여부"이며 그 자리는 요령성 개원이라고 하였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 p.168) 발해의 부여부는 고구려 부여성 자리를 이은 곳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장성은 개원 쪽에서 요하 하구의 바다까지 이어진 셈이다.

고려는 옛 성을 고쳐 썼다. 장성을 쌓기 4년 전인 현종 20년(1029), 유소는 흥화진 서북쪽 40리의 "옛 돌성"을 고쳐 위원진을 두고, 흥화진 북쪽의 "옛 돌 보루"를 고쳐 정융진을 두었다. (『고려사』 권94 열전7 유소) 위원과 정융은 모두 천리장성이 지나는 13성에 들어 있다. 예종 14년(1119) 고려가 장성을 3척 높이자 금나라가 막았는데, 고려는 "옛 성을 보수하는 것"이라 답하고 공사를 이어 갔다. (『고려사』 권14 예종 14년 12월 — 『압록과 고려의 북계』, p.161 재인용)

고구려가 쌓은 성을 고려가 고쳐 쓰고 이어 쌓았다. 나는 이렇게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다시 그려 본 천리장성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내용과 고구려의 옛 성을 고쳐 다시 쌓은 천리장성이라는 기록을 토대로 내가 다시 그려본 천리장성의 자리는 아래와 같다.

다시 그린 천리장성
다시 그린 천리장성

장성은 요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한다. 요하 동쪽 기슭을 따라 올라가며 요양(고려 서경)·심양·철령의 서쪽을 지나 황룡부(개원) 북쪽에 이른다.

장성을 도시들의 서쪽에 그린 까닭은 단순하다. 장성은 거란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고, 거란은 요하 서쪽에 있었다. 장성은 적과 지켜야 할 도시 사이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서경 요양과 심양, 철령이 장성 안쪽에 놓인다. 요양과 심양 앞에는 태자하와 혼하가 흐른다. 요하를 건너고, 장성을 넘고, 다시 강을 건너야 서경에 닿는다.

교과서의 천리장성은 누구를 막는 장성인가

앞에서 본 교과서의 천리장성 지도를 다시 보자. 거란과 맞닿은 곳은 장성의 서쪽 끝, 압록강 하구의 짧은 구간뿐이다. 천여 리의 나머지는 모두 북쪽의 여진을 향하고 있다. 이 지도대로라면 천리장성은 거란이 아니라 여진을 막는 장성이다.

그런데 『고려사』는 장성을 쌓을 때 "이 공사에 거란이 와서 다투었다(是役 契丹來爭)"고 적었다. (『고려사』 권94 열전7 유소) 장성을 쌓기 2년 전인 1031년에는 고려가 거란에 압록강의 성과 다리를 헐어 달라고 청하였다. (『고려사』 권5 덕종 즉위년 10월) 천리장성은 거란과 맞선 장성이었다.

그렇다면 그 무렵 여진은 어떠했는가. 천리장성은 1033년에 쌓기 시작하여 정종 10년(1044)경 완성되었다. 장성을 쌓기 시작한 1033년 10월에도 동여진과 서여진의 우두머리 100여 명이 잇따라 고려에 와서 조회하였다. (『고려사』 권5 덕종 2년 10월) 여진의 우두머리들은 고려에 토산물을 바치고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물론 여진이 변경을 노략질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여진은 고려를 섬기는 무리였다. 세월이 흘러 1109년, 여진의 사신은 고려 임금 앞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우리 태사 영가가 "우리 조상은 대방(大邦, 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기까지 의리상 마땅히 귀부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도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여깁니다. (昔我太師盈歌嘗言 我祖宗出自大邦 至于子孫 義合歸附 今太師烏雅束亦以大邦爲父母之國)

(『고려사』 권13 예종 4년 6월)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겼다. 그런 여진을 막겠다고, 정작 거란과 맞닿은 곳은 짧게 두고 여진 쪽 높은 산줄기 위에 천여 리의 돌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왜 산이 아니라 평야와 구릉이어야 하는가

천리장성이 정말 평안북도의 높고 험한 산줄기 위에 있었다면, 그건 너무 비합리적이다.

거란은 말을 타고 싸우는 기마민족이다. 거란의 기마병은 평균 1,000미터에 이르는 산줄기를 넘어오지 않는다. 말이 달릴 수 있는 평야와 낮은 구릉으로 온다. 그런데 교과서는 고려가 그 기마병을 막겠다고,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지금 치수로 약 5~9미터)인 돌성을 해발 수백, 수천 미터의 산줄기 위에 천여 리나 이어 쌓았다고 한다. 천여 리에 이르는 성곽을 이어 쌓고, 그 위에 병력을 상주시키며 수십 년간 지켜야 하는 천리장성이라면, 이렇게 험한 지형에 만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높고 험한 산은 그 자체로 이미 방어선이다. 굳이 그 위에 막대한 석축 장성을 포개어 쌓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군대와 물자가 오가기 쉬운 평야나 구릉지대이야말로, 거란의 기마병이 곧바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지형이고 천리장성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다.

다시 그린 천리장성의 자리를 지금의 지형과 견주어 보았다.

구간해발 높이
요하 하구 ~ 요양 서쪽0~17미터
요양 서쪽 ~ 철령28~55미터
철령 ~ 개원 북쪽80~150미터
교과서의 천리장성 (낭림·적유령산맥)평균 800~1,500미터

(해발 높이: Open-Meteo 표고 자료로 지금의 지형을 잰 값)

요하설의 천리장성은 철령 남쪽까지 해발 60미터가 되지 않는 요하 평야를 지난다. 철령 북쪽부터 개원까지만 낮은 구릉이다. 거란의 기마병이 곧바로 달려들 수 있는 땅, 바로 그 땅에 장성이 있었다.

남주성은 강동6주의 하나인 용주(龍州)가 곧 황룡부임을 밝히고 있다.

용주는 황룡부(黃龍府)로서, 본래 발해 부여부(扶餘府)인데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 이곳에 이르러 죽을 때 황룡이 나타났기에 이름을 고쳤다. (…) 용주의 위치에 대하여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는 요령성 개원현이라고 되어있어서 서희장군이 설치한 곳과 지리상 부합된다고 보인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 p.168)

윤한택은 고려의 북쪽 국경 자체를 이런 지역적 거점들에 걸친 것으로 설명한다.

고려국 북계 봉강(封疆)은 고려 태조 왕건 시기부터, 조선 태조 이성계 시기까지 일관되게 요좌(遼左)·요동(遼東) 등으로 표현되는 지역의 경계, 그 자연물로서의 요수, 요하였고, 그 지역적 거점으로서 요양, 심양, 철령, 개원 등에 걸치고 있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 p.137, 윤한택(2017) 재인용)

요양과 심양, 철령과 개원—네 지명 모두 지금의 요령성 평야 지대에 자리한 도시들이다. 이전 글에서 나는 당시의 평양과 압록강이 지금 북한에 있는 평양과 압록강이 아닌, 요양과 요하라고 밝힌 바가 있다. 따라서 천리장성은 지금의 요하, 당시의 압록강 동쪽 기슭의 평야와 구릉지대에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어야 한다.

높이 1,000미터가 넘는 북한의 산을 거란군이 말을 타고 굳이 넘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고려사의 또 다른 기록, 병지의 "동쪽으로 바다에 닿았다"는 구절이다.

요하설의 천리장성은 요하 하구에서 동북쪽으로 올라가 개원 부근에 이른다. 그런데 병지는 장성이 서해 바닷가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뻗어 "동쪽으로 바다에 닿았다"고 하였다. 시작점이 이미 서해 바닷가이니, 동쪽 끝의 바다는 다른 바다여야 한다.

이 구절을 받아들이면 장성의 동쪽 끝은 다시 동해안 어딘가가 된다. 그러면 장성은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산줄기를 가로질러야 하고, 앞에서 던진 물음, 곧 기마족을 막는 장성을 왜 높은 산 위에 쌓느냐는 물음이 그대로 돌아온다.

요하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도 이 구절은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윤한택은 그 구절이 없는 고려사의 열전을 인용하여 3성에서 글을 맺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압록과 고려의 북계』의 저자들에게 직접 물어보려 한다. 답을 얻으면 이 글에 덧붙이겠다.

고려사의 또 다른 기록인 병지의 "동쪽으로 바다에 닿았다"라는 구절이 있다고 천리장성을 의주에서 시작하여 동해안 도련포까지 이어지는 해발 평균 1,000미터 안팎 위를 지나는 장성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역사의 기록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도 많아 특정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기록들의 전후 맥락을 살피고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병지의 기록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지금으로서는 요하 동쪽의 천리장성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한다.

다음 편에서

지금까지 나는 고려의 서북쪽 국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다음 편에서는 동북쪽 국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고려의 전체 국경선을 그어 볼 예정이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② 윤관의 동북9성은 어디에 있었나?

몸철학 드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