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묘청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하편)
임금을 버린 반란이었나
그런데 이 반란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서경 쪽은 새 임금을 세우지 않았다. 이덕일은 이것을 인종을 황제로 받들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p.248)
개경에서 사신이 오자 서경의 장수들은 군복 차림으로 뜰에 내려와 절했다. 왕의 안부를 묻고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편지 한 통을 주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입니다." (『고려사』 권127, 묘청전)
이어 서경이 올린 표문은 더 분명하다.
폐하께서는 음양의 지극한 말을 믿고 대화궁을 지으셨으니, 천하의 황제가 머물 도읍을 만드신 것입니다. … 그런데 신하들이 임금의 마음을 본받지 않고 자기 고향 땅만 생각하여 천도를 주저하고 가로막을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 폐하께서 수레를 타고 오신다면 병기를 버리고 싸움을 멈출 것입니다.
서경이 겨눈 것은 왕이 아니었다. 왕을 붙잡고 있는 개경의 신하들이었다. 개경의 신하들은 "신하가 임금을 부르니 그 사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종은 사자에게 술과 비단을 내리고 벼슬까지 주어 돌려보냈다.
김부식은 정지상부터 죽였다
김부식은 서경에서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기 전, 재상들에게 말했다. "서경의 반역은 정지상·김안·백수한이 함께 꾸민 것이다. 이들을 없애지 않으면 서경을 평정할 수 없다." 그리고 세 사람을 궁문 밖으로 끌어내 목을 벤 뒤에 왕에게 알렸다. (『고려사』 권98, 김부식전)
『고려사』는 당시 사람들의 말도 함께 적어 두었다. 김부식은 평소 정지상과 문장으로 이름을 다투었는데, 쌓인 불만 때문에 이때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고려사』 권127, 묘청전)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묘청이 왕명 없이 국호를 고치자 정지상은 왕 곁에서 묘청을 반대했다고 했다. (『조선상고사』 총론, p.72) 이에 따르면 정지상은 묘청에 반대하였는데, 재판도 없이 죽은 것이다.
정지상이 남긴 시 한 편은 지금도 널리 읽힌다. 이별의 눈물을 노래한 「송인(送人)」이다.
대동강 물은 언제 마를 것인가 /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에 더해지는데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 정지상, 「송인」)
묘청의 머리를 바쳤는데도
인종은 김부식에게 칼을 내리며 당부했다. "서경 사람도 모두 내 자식이다. 우두머리만 없애고 많이 죽이지 말라." (『고려사』 권98, 김부식전)
장수들은 서둘러 쳐들어가자고 했다. 김부식은 듣지 않았다. 서경은 5~6년을 준비해 왔으니 기습은 늦었다고 보았다. 그는 서경으로 곧장 가지 않고 북쪽 여러 성을 돌며 민심을 붙잡았다. 서경에 사람을 보내 여덟 번이나 항복을 권했다.
싸움은 빨리 끝나는 듯했다. 서경 사람들이 묘청과 유참, 유참의 아들 유호의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윤첨 등을 개경으로 보내 머리를 바치고 죄를 빌었다.
항복을 반란으로 되돌린 것은 개경이었다
김부식은 부하를 개경에 보내 서경이 항복했다고 알렸다. 그리고 재상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항복하러 온 윤첨 등을 후하게 대해 주십시오. 그래야 서경 사람들이 새롭게 살 길이 열립니다." (『고려사』 권98, 김부식전)
그런데 개경의 재상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들에게는 누가 공을 세웠느냐가 더 중요했다. 재상 문공인 등은 김부식의 부하를 나무랐다.
너의 원수(김부식)는 서경으로 곧장 가지 않고 먼 길로 돌아서 갔다. 서경이 항복한 것은 우리가 임금께 아뢰어 조서를 보낸 덕분이다. 너의 원수가 세운 공이 아니다.
(『고려사』 권98, 김부식전)
윤첨 일행이 개경 가까이 이르자 재상들은 형리를 보내 그들에게 칼을 씌우고 쇠사슬로 묶으려 했다. 재상들과 관리를 감찰하는 대간은 윤첨 일행을 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하자고 했다. 인종은 처음에 이를 물리쳤다. 오히려 밧줄을 풀어 주고 옷과 갓을 갖추게 한 뒤 만났다. 술과 음식을 내리고 손님의 숙소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윤첨 일행은 결국 옥에 갇혔다.
서경 세력은 이 소식을 들었다. 항복하러 간 사람들마저 옥에 갇혔다. 그들은 항복해도 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시 성문을 닫고 맞섰다.
인종은 서경을 다시 달래려고 사신 김부와 황문상을 보냈다. 그런데 두 사신은 달래기는커녕 위세로 서경 사람들을 겁박했다. 화가 난 서경 군사들은 두 사신과 따라간 사람들을 죽였다. 1135년 2월의 일이다.
이제 되돌아갈 길은 없었다.
묘청은 이미 죽었다. 그런데도 묘청의 난은 이때부터 1년을 더 갔다. 공을 다투던 개경의 세력들이 빨리 끝날 수 있었던 싸움을 되살린 것이다.
아이와 여자들까지 기와를 던졌다
서경 사람들은 강을 따라 선요문에서 다경루까지 1,734칸의 성을 새로 쌓았다. 관군의 전함이 썰물에 갇히자 기름을 끼얹은 배에 불을 붙여 흘려보내 관군의 전함을 불태웠다. (『고려사』 권98, 김부식전)
개경에서는 사상자를 따지지 말고 날짜를 정해 깨뜨리라는 독촉이 이어졌다. 김부식은 이렇게 답했다.
서경은 하늘이 만든 험한 곳이라 쉽게 칠 수 없습니다. 성 안에는 병사가 많고 지키는 것이 엄합니다. 아이와 부녀자들도 벽돌과 기와를 던지니 오히려 강한 적입니다.
이긴 쪽 장수의 말이다. 서경은 묘청 한 사람의 반란이 아니었다. 서경 사람들 모두의 싸움이었다.
흙산과 불의 공격
1135년 10월, 성 안의 양식이 떨어졌다. 서경은 노약자와 부녀자를 성 밖으로 내보냈다. 모두 굶주려 사람의 얼굴빛이 아니었다.
11월, 김부식은 양명포에 흙산을 쌓기 시작했다. 서남쪽 고을의 군사 23,200명과 승려 550명이 흙과 돌을 져 날랐다. 흙산은 높이 8장, 길이 70여 장, 너비 18장에 이르렀다. 조언이라는 사람이 만든 포기(砲機)는 수백 근의 돌을 날려 성루를 부수었다.
김부식의 막하에서 싸운 윤언이는 불의 공격을 증언했다. 돌과 함께 불덩이를 쏘아 올리니 "그 불꽃이 번개 같고, 크기가 수레바퀴 같았다"고 했다. (『고려사』 권96, 윤언이전)
1136년 2월, 서경이 성 안에 겹성을 쌓기 시작했다. 윤언이는 지금 쳐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관군은 세 갈래로 성을 넘었다. 그날 밤 성 안은 무너졌다.
끝까지 버틴 사람들의 이마에는 '西京逆賊(서경역적)' 네 글자를 새겨 섬으로 보냈다. 그다음 사람들에게는 '西京(서경)' 두 글자를 새겼다. 묘청과 정지상, 조광 등, 서경 세력 주요 인물들의 처자식은 동북쪽 여러 성의 노비가 되었다.
반란 뒤의 고려
반란은 끝났다. 그러나 고려는 그 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서경의 급을 낮추다
『고려사』 지리지는 반란 뒤 서경에 일어난 일을 한 줄로 적었다.
유수·감군·분사어사를 제외하고 관반을 모두 없애고, 이어 경기 4도를 깎아 6현을 두었다. (除留守、監軍、分司御史外 悉汰官班 尋削京畿四道 置六縣)
(『고려사』 권58, 지리지3 북계 서경유수관 평양부)
서경은 숙종 때부터 개경과 같은 문무반의 관제를 갖춘 두 번째 서울이었다. 그 서경이 유수 몇 사람만 남은 작은 고을로 급이 낮아졌다.
김부식의 시대가 되다
김부식은 수충정난정국공신이 되었다. 문하시중에 올랐고 국사를 감수하는 일까지 맡았다.
개경으로 돌아온 그는 윤관의 아들이자 묘청 세력과 싸웠던 윤언이를 탄핵했다. 윤언이가 정지상과 깊이 결탁했다는 것이다. 윤언이는 양주로 좌천되었다. 그는 서경 세력에게 불로 공격을 주장하고 마지막 총공격을 앞장서 주장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래된 악연이 있었다. 윤관이 지은 대각국사의 비문을 김부식이 고쳐 지었다. 또 인종 앞에서 김부식이 『주역』을 강론할 때 윤언이가 이리저리 따져 물었다. 김부식은 답을 못해 "땀이 얼굴을 덮었다."
김부식이 고발한 윤언이의 죄는 이랬다.
1132년 연호를 세우고 황제를 칭하자고 청했고, 국학생들을 시켜 같은 일을 아뢰게 해 "대금(大金)을 격노하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금나라를 화나게 하는 것이 죄가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되돌아온 사람들
그러나 인종의 마음은 끝까지 김부식에게만 있지 않았다. 1140년, 인종은 김부식의 반대를 무릅쓰고 윤언이를 사면했다. 1142년 김부식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서경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모두 복권했다.
『삼국사기』와 무신정변
물러난 김부식은 1145년 『삼국사기』를 지어 바쳤다. (『고려사』 권98, 김부식전)
서경을 무너뜨린 사람이 우리 고대사를 쓴 것이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렇게 썼다. "김부식이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하여 『삼국사기』를 지은 것이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은 젊은 나이에 궁중의 나례 행사에서 촛불로 무인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다. 정중부는 이 일을 잊지 않았다.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김돈중은 도망치다 죽었다. (『고려사』 권98, 김돈중전)
이덕일은 묘청이 패한 뒤 고려에서 사대적 유학정치가 더욱 강해졌고, 무신들은 문신의 경호부대로 떨어졌다고 본다. 그 끝이 약 35년 뒤의 무신정변이라는 것이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p.249)
그리고 1174년, 서경은 다시 일어섰다. 서경유수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맞섰고, 서경에 딸린 40여 성이 호응했다. 이 이야기는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에서 다루었다.
글을 마치며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간다. 묘청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금나라의 신하가 된 나라에서, 묘청은 황제의 나라를 말했다.
개경 문벌의 나라에서, 그는 서경의 황제 나라를 말했다. 왕은 6년 동안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을 돌렸다. 묘청은 왕을 서경으로 모셔 오려고 칼을 들었다.
신채호는 이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다.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곧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를 어찌 1천 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나는 신채호 선생의 이 글을 읽으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이 떠오른다.
이 두 사건은 마치 쌍둥이처럼 우리 역사에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1145년,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이렇게 적었다. "중국에 신속(臣屬)한 한쪽 구석의 작은 나라는 본래 사사로이 연호를 지어 쓰지 못하는 것이다." 신라 법흥왕이 스스로 연호를 쓴 것을 두고도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였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진덕왕 4년 사론 — 『삼국사기(상)』, p.153)
1388년,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반대하며 첫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불가하다(以小逆大)." (『고려사』 권137, 열전50 신우) 그리고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조선을 건국하였다.
240여 년을 사이에 두고 같은 역사가 되풀이 된 것이다.
나는 가슴을 치며 묻지 않을 수 없다.
작은 나라 고려는 자신들의 연호도 가질 수 없고,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정말 불가한 일인가?
고려를 작은 나라로 만든 자들은 바로 당신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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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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