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이성계는 왜 위화도에서 돌아섰나?
지난 글 「⑩ 철령위는 어디였나?」에서 나는 명나라의 정사가 남긴 한 줄을 소개했다.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으니 곧 옛 철령성이다. 고려와 경계를 맞댄다. (東南有奉集縣 即古鐵嶺城也 接高麗界)
(『명사』 권41, 지리지 요동도지휘사사 철령위)
명나라가 1388년 3월 철령위를 세운 곳은 함경남도가 아니었다. 지금의 심양 남쪽, 고려와 경계를 맞댄 요동이었다. 명나라 스스로 그렇게 적었다.
그해 4월, 고려의 군대가 그 요동을 향해 평양을 떠났다.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이끄는 3만 8천여 명이었다. 그리고 한 달 뒤, 그 군대는 압록강의 작은 섬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이성계는 왜 돌아섰을까? 그리고 그가 돌아서지 않았다면 요동은 우리 땅이 되었을까?
봉주의 '네 가지 불가'
1388년 4월 1일, 우왕은 봉주에서 최영과 이성계를 불렀다. "내가 요양을 치려 하니 경들은 힘을 다하라." 이성계는 반대했다.
지금 군사를 내는 데에는 네 가지 불가한 것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이 첫째 불가입니다.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둘째 불가입니다. 나라를 들어 멀리 정벌하면 왜구가 그 빈틈을 탈 것이 셋째 불가입니다. 때가 바야흐로 덥고 비가 오는 철이라 활의 아교가 풀리고 큰 군대가 역병을 앓을 것이 넷째 불가입니다. (以小逆大 一不可 夏月發兵 二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四不可)
(『고려사』 권137, 열전50 신우 14년 4월)
네 가지 가운데 둘째부터 넷째까지는 때와 형편의 문제다. 장수라면 당연히 따져야 할 일이다. 그런데 첫째는 다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불가하다." 이것은 전술이 아니라 나라를 보는 눈이다. 이성계는 그 눈을 맨 앞에 두었다. 흔히 위화도에서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이 '네 가지 불가'는 출병 전 봉주에서 처음 한 말이고, 위화도에서도 같은 이유를 되풀이했다.
이성계는 서경에 머물렀다가 가을에 군사를 내자고도 했다. 우왕은 듣지 않았다. "경은 이자송을 보지 못했느냐?" 이자송은 한 달 전 요동 정벌을 막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이다. 물러나온 이성계는 울며 말했다. "백성의 화가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生民之禍 自此始矣)."
4월 18일, 군대는 평양을 떠났다. 최영은 우왕 곁에 남았다.
위화도는 어디였나
여기서 한 가지를 짚고 가자. 위화도가 지금의 압록강에 있는 섬이 아니라는 글들이 있다. 나도 이 기록을 의심해 본 적이 있다. 그래서 기록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먼저 『고려사』다.
5월 경진일(7일), 좌우군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주둔하였다. (左右軍渡鴨綠江 屯威化島)
(『고려사』 권137, 신우 14년 5월)
여섯 날 뒤 두 도통사가 올린 글에는 그 섬의 모습이 나온다.
신들이 떼를 타고 압강을 건너니 앞에 큰 내가 있는데 비 때문에 물이 불었습니다. 첫째 여울에서 떠내려가 빠진 자가 수백 명이고, 둘째 여울은 더욱 깊어 섬 가운데에 머물며 한갓 군량만 낭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동성까지는 그 사이에 큰 내가 많아 건너기 어려울 듯합니다. (臣等乘桴 過鴨江 前有大川 因雨水漲 第一灘漂溺者數百 第二灘益深 留屯洲中 … 自此至遼東城 其閒多有巨川)
(『고려사』 권137, 신우 14년 5월)
위화도는 강을 하나 건넌 뒤 다시 강물에 갇힌 섬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요동성까지는 큰 내를 여러 번 더 건너야 했다.
조선의 실록은 이 섬을 더 자세히 적었다. 세종 때부터 연산군 때까지 위화도는 의주 백성들이 건너가 농사를 짓던 섬으로 거듭 나온다.
- "위화도는 압록강의 갈라지는 물길이 빙 둘러 감싸고 물이 깊어 건너가기 어렵다." (『세조실록』 세조 10년 8월 4일)
- "위화도는 검동도와 경계를 이루고, 압록강의 흐름이 두 섬 사이에 이르러 두 길로 나뉘어 흐르는데, 위화도를 빙 둘러서 적강에 들어간다." (『세조실록』 세조 10년 11월 17일)
- "의주성에서 30여 리이고, 위화도는 그 반이 더 떨어져 있는데 모두 난자강·압록강 두 강의 밖에 있다." (『성종실록』 성종 19년 6월 13일)
- "의주 위화도·원직도·수청도 등지로 국경을 넘어가 경작하는 자가 있다." (『세종실록』 세종 24년 9월 5일)
기록은 한결같다. 위화도는 의주 앞 압록강이 두 갈래로 나뉘는 사이에 생긴 섬이었다. 지금 신의주 앞에 있는 그 섬이다.
위화도가 다른 곳에 있었다는 글들도 읽어 보았다. 한자 풀이나 노래 제목에 기대고 있을 뿐, 그것을 뒷받침하는 원문 기록은 찾지 못했다. 나는 근거가 있는 기록을 따른다.
눈여겨볼 글자가 있다. 『고려사』는 이 강을 '鴨綠江', 실사변의 압록강으로 적었다. 「④ 고대의 압록강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이 맞는가?」에서 내가 동압록강이라고 부른 강, 곧 지금의 압록강이다.
위화도의 보름
군대는 섬에 갇혔다.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잇따랐다. 우왕이 잡히는 대로 목을 베라고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 사이 5월 11일, 다른 장수들은 요동에 들어갔다. 니성원수 홍인계와 강계원수 이의가 먼저 요동 경내에 들어가 적을 죽이고 사로잡아 돌아왔다. 우왕은 기뻐하며 상을 내렸다. (『고려사』 권137, 신우 14년 5월) 요동은 들어갈 수 없는 땅이 아니었다.
5월 13일, 조민수와 이성계는 두 번째로 회군을 청했다. 그 글의 한가운데에 이런 말이 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입니다. 우리 나라는 삼한을 하나로 한 뒤로 큰 나라 섬기기를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현릉(공민왕)은 홍무 2년에 명나라를 섬기며 그 표문에 '자손 만대에 길이 신하가 되겠다'고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以小事大 保國之道 我國家統三以來 事大以勤 玄陵於洪武二年 服事大明 其表云 子孫萬世 永爲臣妾 其誠至矣)
(『고려사』 권137, 신우 14년 5월)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않았다. 환관을 보내 진군을 재촉했다.
5월 22일, 군중에 이성계가 자기 군사를 이끌고 동북면으로 떠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민수가 홀로 말을 달려 와 울며 물었다. "공이 가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오?" 이성계는 장수들에게 말했다.
만약 상국의 경계를 범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으면 종사와 백성의 화가 곧 닥칠 것이다. … 어찌 경들과 함께 왕을 뵙고 화복을 직접 아뢰고 임금 곁의 악한 자를 없애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 (若犯上國之境 獲罪天子 宗社生民之禍 立至矣 … 盍與卿等見王 親陳禍福 除君側之惡 以安生靈乎)
(『고려사』 권137, 신우 14년 5월)
군대는 압록강에서 회군하였다. 『고려사』는 이때의 이성계를 이렇게 적었다. 흰 말을 타고 강언덕에 서서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렸다. 군사가 다 건너자 큰물이 갑자기 밀려와 섬이 잠겼다. 사람들은 신기하게 여겼다. 아이들은 '목자(木子, 李)가 나라를 얻는다'는 노래를 불렀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다만 『고려사』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이성계를 '우리 태조(我太祖)'라고 부른다. 하늘이 회군을 도왔다는 이야기는 그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
돌아선 칼끝
요동을 향하던 칼끝은 개경을 향했다. 우왕은 장수들에게 글을 보냈다.
하물며 강역은 조종에게서 받은 것인데 어찌 쉽게 남에게 줄 수 있겠는가. (況復疆域 受於祖宗 豈可易以與人)
(『고려사』 권137, 신우 14년 6월)
장수들은 답하지 않았다. 6월 초, 회군은 개경에 들어왔다. 최영은 맞서 싸웠으나 잡혔다. 이성계는 최영에게 "이 일은 내 본심이 아니다"라고 하고 마주 보며 울었다고 한다. 최영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났고, 아홉 살 창이 왕이 되었다.
그리고 개경에 들어온 지 사흘 만에 이런 일이 있었다.
다시 홍무 연호를 쓰고, 명나라의 의관을 따르게 하며, 호복을 금하였다. (復行洪武年號 襲大明衣冠 禁胡服)
(『고려사』 권137, 신우 14년 6월)
요동으로 떠나며 버렸던 명나라 연호와 옷이 그대로 돌아왔다.
명나라는 어땠을까? 『고려사』는 이렇게 적었다. 명나라는 우왕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치려 했다. 황제가 종묘에서 점을 치려고 재계하던 중이었는데, 회군 소식을 듣고 재계를 그만두었다.
회군하지 않았다면 요동은 우리 땅이 되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돌아서지 않았다면 요동은 우리 땅이 되었을 것이라고. 나도 그것이 궁금했다. 양쪽의 기록을 함께 놓아 보자.
가능했다는 기록
첫째, 요동은 비어 있었다. "요동 군사가 모두 오랑캐를 치러 가고 성 안에는 다만 지휘 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 있었다. (『고려사절요』 — 이덕일, 『이덕일의 한국통사』, p.299 재인용)
둘째, 실제로 고려 장수들이 요동 경내에 들어갔다가 무사히 돌아왔다. 홍인계와 이의다.
셋째, 이성계는 요동을 가장 잘 아는 장수였다. 18년 전 그는 직접 요성(요양)을 떨어뜨렸다. (「⑨ 공민왕은 왜 요동을 쳤나?」)
어려웠다는 기록
첫째, 우왕이 기대했던 북원은 이미 무너진 뒤였다. 고려군이 평양을 떠나기 엿새 전, 남옥이 포어아해에서 북원의 임금을 깨뜨렸다. 함께 명나라를 칠 상대가 없었다.
둘째, 명나라 대군은 돌아올 수 있었다. 남옥의 군대는 그해 8월 돌아와 상을 받았다. (丁卯 藍玉師還 大賚北征將士 — 『명사』 권3, 태조본기 홍무 21년 8월) 그리고 주원장은 고려를 칠 점까지 치려 하고 있었다.
셋째, 성을 얻는 것과 지키는 것은 다르다. 1370년 이성계는 요성을 떨어뜨렸지만, 곡식이 떨어져 소와 말을 잡아먹으며 돌아와야 했다. (「⑨ 공민왕은 왜 요동을 쳤나?」)
나의 생각
요동성을 얻는 것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동은 비어 있었고, 이성계는 그 길을 알았다. 그러나 그 땅을 지켜 내는 것은 장담할 수 없다. 북원은 쓰러졌고 명나라의 대군은 돌아오고 있었다. "요동은 우리 땅이 되었을 것"이라고 잘라 말하는 것은 너무 멀리 가는 말이다.
다만 하나는 분명하다. 싸워 보고 진 것과 싸우기도 전에 돌아선 것은 다르다. 싸워 보고 졌다면 고려는 여전히 "강역은 조종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나라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의 군대가 요동에 오면 요동을 근거지로 두고 더 우월한 위치에서 명나라와 타협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화도에서 돌아선 군대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라고 말하며 돌아왔다.
위화도에서 잃은 것은 요동이라는 땅만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주인이라는 정신, 자주성을 잃은 것이다. 땅은 잃었다가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나라의 시작부터 자주성을 내려놓은 나라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조선이 그런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글을 마치며
이성계는 네 가지 불가 가운데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을 맨 앞에 두었다. 회군 이후에는 명나라 연호와 옷을 되돌렸다. 4년 뒤 그는 새 나라를 세웠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가 되었을까. 다음 글에서는 조선의 건국을 따라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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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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