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서희의 강동6주는 어디인가?

지난 글 두 편에서 나는 고려의 국경을 이야기하였다.
천리장성은 평안북도의 험한 산줄기가 아니라 요령성 평야에 있었고, 윤관의 동북9성은 함흥평야가 아니라 두만강 너머에 있었다. 그런데 나는 중요한 이야기 하나를 건너뛰었다. 천리장성보다 40년 앞서, 고려의 서북 국경을 처음 넓힌 사람이 있었다. 서희다.

서희의 담판은 우리 외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다. 칼 한 번 섞지 않고 땅을 얻었다. 교과서는 그 땅을 '강동6주'라 부른다. 흥화진은 의주, 용주는 용천, 통주는 선천, 철주는 철산, 곽주는 곽산, 귀주는 구성. 모두 지금의 평안북도다.

교과서에 실린 서희의 강동6주 위치 지도
우리가 배운 강동6주 (연두색)

갑자기 웃긴 생각이 든다. 저 지도의 연두색 영역이 강동6주가 맞다면 명칭이 '강하6주'가 정확하지 않는가? 그런데 역사는 '강동6주'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희는 무엇을 말했는가

성종 12년(993) 10월, 거란 장수 소손녕이 쳐들어왔다. 소손녕은 글을 보내 "80만 군사가 이르렀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려 조정은 흔들렸다.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고 황주에서 절령까지를 경계로 삼자는 말까지 나왔다.

서희가 반대했다.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까지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이 차지하고 있던 곳입니다. 광종께서 이를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온 뜻은 이 두 성을 빼앗으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고려사』 권94, 열전7 서희)

이 말을 기억해 두자. 뒤에서 다시 꺼낼 것이다.

서희는 국서를 들고 적진으로 갔다. 소손녕이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 너희가 침범했다"고 말하자 서희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 땅의 경계를 따진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 안에 있다. 어찌 침범이라 하는가. 또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이다. 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훔쳐 살며 길을 막고 있다.

(『고려사』 권94, 열전7 서희)

거란은 군사를 물렸다. 『요사』는 그 결과를 이렇게 적었다.

조서를 내려 여진의 압록강 동쪽 수백 리 땅을 떼어 주었다(詔取女直鴨淥江東數百里地賜之).

(『요사』 권13, 성종본기 통화 11년)

이듬해인 994년 2월, 소손녕이 다시 글을 보냈다. 거란은 압강(鴨江) 서쪽에 다섯 성을 쌓고, 고려는 "안북부에서 압강 동쪽까지 280리"에 성을 쌓으라는 내용이었다. (『고려사』 권3, 성종 13년 2월)

서희는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이라고 말했다. 거란은 "압록강 동쪽 수백 리"를 내주었다. 그렇다면 이 압록강은 어느 강이었을까?

여섯 주인가, 여덟 주인가

먼저 숫자부터 짚어야 한다. 우리 사서는 서희가 쌓은 성을 여덟 곳으로 적었다.

  • 성종 13년(994): 장흥진·귀화진, 곽주·귀주
  • 성종 14년(995): 안의진·흥화진
  • 성종 15년(996): 선주·맹주

(『고려사절요』 권2, 성종 13~15년)

그런데 교과서는 여섯 주만 가르친다. 흥화진·용주·통주·철주·곽주·귀주다. 이 여섯 이름은 우리 사서가 아니라 『송사』, 『요사』, 청나라 때 편찬된 『속자치통감』에서 왔다.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람이 남주성 교수다. 책이 나온 2017년 당시 그는 한양대학교 겸임교수였다. 그는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가 편찬한 『압록과 고려의 북계』에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이라는 논문을 실었다. 윤한택·복기대·남의현·이인철 등과 함께 쓴 이 책은 내가 이 블로그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책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쓴다.

우리 사학계에서는 「고려사절요」나 「동사강목』의 기록에 대하여 오기이거나 다른 이칭 중복기재 등으로 보고, 중국의 기록을 근거로 6주를 정하였다. 그런데 … 우리나라의 기록을 부인할 특별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 6주로 축소한 것은 문제가 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 p.126)

나도 같은 생각이다. 우리 기록이 여덟이라 하면 여덟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글에서도 서희가 쌓은 성을 '8주'로 본다.

평안북도라는 비정은 어디서 왔나

강동6주를 평안북도에 둔 근거는 조선 중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이다. 이 책은 흥화진을 의주 남쪽 옛 영주로, 귀주를 귀성으로, 곽주를 곽산으로 적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한치윤의 『해동역사』,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도 모두 평안도에서 찾았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이 비정은 일제가 처음 만든 것이 아니다. 남주성 교수도 "서희가 개척한 6주가 오늘날 압록강 동쪽이라고 한 것은 일제식민사학의 영향이라기 보다는 그 이전 조선조에서 저술된" 책들에 이미 있다고 밝혔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36 각주 52)

나는 이전 글 ② 우리 국경이 축소되어 가는 과정에서 동북9성이 한백겸 이후 조선 학자들의 손에서 한반도 안으로 끌려 내려왔다고 썼다. 강동6주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학자들도 막힌 곳이 있었다. 안정복은 장흥진과 귀화진을 "지금은 모두 미상"이라고 적었다. 한치윤은 서희가 쌓은 것은 여덟 성인데 이름도 같지 않으니 "왜 그런지는 상세히 알 수가 없다"고 했다. 한반도 안에서 찾으려 하니 아귀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쓰다 소우키치는 이 틀을 굳혔다. 그는 압록강 안팎이 우리 땅이라는 서희의 말을 "거짓말 하는 버릇"이라고 깎아내렸다. 이 이야기는 이미 두 번 소개했다.

과연 서희가 거짓말을 했을까? 기록을 다시 보자.

기록과 맞지 않는 다섯 가지

하나, 다툴 이유가 없다

교과서대로라면 담판 전 고려의 국경은 청천강이다. 거란의 수도 상경은 지금의 내몽골 파림좌기에 있었다. 청천강 남쪽에 있는 고려와 거란이 땅을 두고 다툴 까닭이 없다. 이덕일 역사학자는 거란과 고려의 충돌이 압록강 북쪽 땅을 둘러싼 것이었다고 보았다. (이덕일, 『이덕일의 한국통사』, p.239~240)

둘, 가주와 송성은 어디인가

서희는 거란이 온 목적이 가주와 송성에 있다고 했다. 두 성은 "거란의 동경에서 우리 안북부까지 수백 리" 사이에 있었다. 청나라가 편찬한 『성경강역고』는 가주가 봉천, 곧 지금의 심양 경내에 있다고 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36)

가주가 요령성에 있었다면, 서희가 지키려 한 땅도 요령성에 있었다.

셋, 장흥진과 귀화진은 왜 '미상'인가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두 진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요사』 지리지 중경도에 장흥현과 귀화현이 나온다. 중경대정부는 요서 지역이다. 귀화현은 "본래 한나라 유성현 땅"이라고 했다. (『요사』 권39, 지리지 중경도)

남주성 교수는 두 진이 요서에 세워졌다가 일찍 거란에 넘어갔기 때문에 고려 쪽 기록에서 사라졌다고 보았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64~165)

넷, '압강'은 어느 강인가

복기대는 『고려사』의 강 이름 표기에 주목했다. 성종 10년(991) 기사는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냈다"고 적었다. 그런데 성종 13년 소손녕의 글에는 '압록강'이 아니라 '압강'이 나온다. 압록강 밖이 이미 고려 땅이었다면, 280리의 기준이 된 압강은 그보다 더 서쪽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복기대, 「중국학계의 거란 동쪽 국경인식에 대하여」, p.233)

나는 ④ 고대의 압록강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이 맞는가?에서 고려 때의 압록강이 지금의 요하였다고 썼다. 그렇다면 서희가 얻은 "압록강 동쪽" 땅도 요하 동쪽에서 찾아야 한다.

다섯, 귀주대첩의 강은 어디로 흐르나

1018년 강감찬이 거란군을 크게 무찌른 곳이 귀주다. 『요사』는 이 싸움을 이렇게 적었다.

소배압 등이 고려와 다하(茶河)·타하(陀河) 두 강에서 싸웠다. 요군이 불리하여 천운·우피실 두 군에서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요사』 권16, 성종본기 개태 7년 12월)

『요사』 지리지는 타하가 귀덕주에 있다고 했다. 『성경강역고』는 그 귀덕주가 지금의 철령 동남쪽에 있다고 했다. 청나라 편찬자들조차 이 기록이 평안도와 맞지 않는 데 의문을 품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69~170)

다시 그려 본 서희의 8주

남주성 교수는 『요사』, 『금사』, 『성경강역고』의 지명을 하나하나 대조했다. 그가 추정한 자리는 이렇다.

이름교과서 비정남주성 교수의 추정
귀화진(미상)요령성 조양 부근
장흥진(미상)요령성 의현 부근
흥화진평북 의주요령성 창도 부근
용주평북 용천요령성 개원 부근
귀주평북 구성개원과 철령 사이
철주평북 철산요령성 철령 부근
곽주평북 곽산철령 부근
통주평북 선천철령·개원 일대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65~171. )

다시 그려 본 서희의 강동6주
다시 그려 본 서희의 강동6주
이 그림은 내가 A.I의 힘을 빌려 그려본 것이다.
이 지도에서는 강동6주가 강하6주가 되지 않고 실제로 강동6주로 보이지 않는가?
강동6주의 위치를 알려면 우선 두 압록강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를 서압록강 (鴨淥江 록자의 한자가 삼수변임)과 동압록강 (鴨綠江 록자의 한자가 실사변임)으로 부른다.

글을 마치며

서희는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이라고 말했다. 쓰다 소우키치는 그를 거짓말쟁이라 했다. 그러나 『요사』와 『성경강역고』의 지명을 따라가면, 서희의 말은 오히려 기록과 맞아 든다.

강동6주가 평안북도에 있었다는 비정으로는 풀리지 않는 것이 많다. 거란은 왜 쳐들어왔는가. 장흥진과 귀화진은 왜 사라졌는가. 귀주대첩의 강은 어디를 흘렀는가.

그런데 물음이 하나 더 남는다. 거란은 왜 그 땅을 내주었을까. 정말 서희의 말솜씨 때문만이었을까. 다음 글에서는 거란의 입장에 서서 그 담판을 다시 보려 한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④ 거란은 왜 강동6주를 내주었나?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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