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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고인돌은 왜 요하를 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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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 ⑧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였는가? (하편) 」에서 나는 고조선 중기 이후의 중심을 요양 일대로 보았다. 요양 남쪽 해성과 개주에는 요동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 서 있다고 썼다. 그런데 물음이 하나 남았다. 고조선이 처음 일어난 조양 일대, 곧 요서에는 왜 고인돌이 없을까? 이 물음을 나만 던진 것은 아니다. 오래전 한 역사 카페에 올라온 글이 이 점을 짚었다. 그 글은 고인돌이 요하 동쪽에만 있고 요서에는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요동의 고인돌 문화를 고조선과 별개의 문화로 보았다. 이 주제는 가볍게 넘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연구한 나의 의견을 밝히려 한다. 고인돌은 요하를 넘지 않았다 사실부터 확인해 보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중국 요령성의 고인돌은 750여 기다. 대부분 요동반도와 발해만 연안에 있다. 북한에서는 대동강과 재령강 일대에 모여 있다. 그리고 서해 연안을 따라 요령에서 전남까지 이어진다. 요하 서쪽, 곧 요서에서 고인돌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고인돌은 요하를 넘지 않았다. 고인돌 비파형 동검 분포도 나는 「 ② 고대의 국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에서 이 차이를 장례 방식의 차이로 설명했다. 요서 사람들은 돌덧널무덤과 움무덤에 비파형동검을 묻었고, 요동과 한반도 사람들은 고인돌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왜 방식이 달랐는지를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로 만든 무덤은 요하 양쪽에 다 있었다 실마리는 요동의 무덤을 다시 보는 데서 나왔다. 요동에는 고인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편 한국사』 4권은 요동에서 가장 이른 청동기 유적인 쌍방유형의 대표 유적을 "석관묘와 지석묘"라고 적었다. 석관묘는 돌널무덤이고, 지석묘는 고인돌이다. 요양의 이도하자에도 돌널무덤이 있다. 요동반도 끝의 강상과 누상에는 돌무지무덤이 있다. 심양 정가와자 6512호 무덤은 땅을 파고 나무로 방을 짠 무덤이다. (『신편 한국사』 4권, 「비파형청동단검문화」) 돌널무덤...

⑥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하) — 살수는 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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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⑤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상) — 세 나라의 기록」 에서 나는 『삼국사기』와 『수서』, 『환단고기』가 적은 살수대첩을 읽었다. 그리고 하나의 물음에 이르렀다. 살수는 압록수와 평양 사이를 흐르는 강이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지금의 요양이고 고구려의 압록이 지금의 요하라면, 살수는 요하와 요양 사이 어딘가를 흐르는 강이어야 한다. 이번 글에서는 그 강을 찾아간다. 450리는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인가? 기록은 살수에서 무너진 수나라 군사가 하루 낮 하룻밤 만에 450리를 달아나 압록수에 이르렀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 450리는 얼마나 먼 거리일까. 수·당 때의 1리가 몇 미터였는지는 견해가 갈린다. 가장 짧게 잡는 견해는 1리를 약 323m로 본다. 이렇게 잡아도 450리는 약 145km다.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직선거리와 비슷하다. 1리를 더 길게 잡으면 거리는 더 늘어난다. 옛 군대는 하루에 얼마나 걸었을까. 옛사람들은 군대가 하루에 가는 거리를 30리로 잡고, 이를 '한 사(舍)'라 불렀다. 『춘추좌전』의 '퇴피삼사(退避三舍)', 곧 "삼 사를 물러난다"는 말은 사흘 거리인 90리를 물러난다는 뜻이다. 450리는 보통 군대의 보름 치 길이다. 가장 빠른 기병의 기록도 있다. 『삼국지』 「선주전」에는 조조가 유비를 쫓을 때의 일이 나온다. 조조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급히 쫓아, 하루 낮 하룻밤에 300여 리를 갔다. (曹公將精騎五千急追之 一日一夜行三百餘里) (『삼국지』 「촉서」 선주전) 짐을 버리고 말을 탄 정예 기병이 달려도 하루 낮 하룻밤에 300여 리였다. 그래서 이 기록은 오늘까지 놀라운 속도의 본보기로 전해진다. 살수에서 무너진 수나라 군사는 어땠는가. 『삼국사기』는 그들이 이미 군량이 떨어져 굶주린 기색이 있었고,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지쳐 있었다고 적었다. 강을 건너다 기습을 당해 무너졌고, 뒤에는 고구려군이 쫓아오고 있었다. 대부분은 말이 아니라 두 발로 달아나는 ...

⑤ 귀주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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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 ④ 거란은 왜 강동6주를 내주었나? 」에서 나는 거란의 자리에 서서 서희의 담판을 다시 보았다. 송과의 문제가 정리되자 거란은 강동6주를 되찾으려 했다. 거란은 1010년과 1018년, 두 차례 더 고려에 크게 쳐들어왔다. 귀주는 「 ③ 서희의 강동6주는 어디인가? 」에서 따라간 서희의 여덟 성 가운데 하나다. 서희가 담판 이듬해인 994년에 쌓은 성이다. 그로부터 25년 뒤, 강감찬이 바로 그 귀주에서 거란군을 무찌렀다. 우리가 살수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3대 대첩이라 부르는 귀주대첩이다. 교과서는 귀주를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지난 글에서 서희의 성들이 요령성에 있었을 가능성을 살폈다. 그렇다면 귀주대첩의 자리도 다시 물어야 한다. 『고려사』가 적은 귀주대첩 1018년 12월, 거란이 세 번째로 쳐들어왔다.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맞섰다. 기병 1만 2천을 산골짜기에 숨기고, 쇠가죽을 큰 밧줄로 꼬아 성 동쪽의 큰 내를 막았다. 적이 오자 막은 물을 터뜨리고 복병을 내어 크게 이겼다. (『고려사』 권94, 열전7 강감찬) 거란군은 개경 가까이까지 내려왔다가 물러갔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개경은 어디였을까. 청나라의 고증은 『독사방여기요』를 인용해 이렇게 적었다. "개경은 곧 개주성(開州城)이다. 왕경(王京)의 서남쪽 200리에 있다. 이때 거란이 개경을 치자 왕은 평주로 달아났다." (開京 即開州城 在王京西南二百里 — 『압록과 고려의 북계』, 윤한택, 「고려 서북 국경에 대하여」, p.35 각주 재인용) 거란의 2차 침입(1010) 때를 두고 한 말이다. 나는 이 기록을 따른다. 거란군이 내려온 개경은 개주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 거란군은 돌아가는 길에 귀주를 지났다. 거란 군사가 귀주를 지나가자 강감찬 등이 동쪽 들에서 맞아 싸웠다. 두 군대가 맞서 승부가 나지 않았다.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우리 군사가 기세를 타고 내달아 치니 용...

③ 서희의 강동6주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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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두 편에서 나는 고려의 국경을 이야기하였다. 천리장성은 평안북도의 험한 산줄기가 아니라 요령성 평야에 있었고, 윤관의 동북9성은 함흥평야가 아니라 두만강 너머에 있었다. 그런데 나는 중요한 이야기 하나를 건너뛰었다. 천리장성보다 40년 앞서, 고려의 서북 국경을 처음 넓힌 사람이 있었다. 서희다. 서희의 담판은 우리 외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다. 칼 한 번 섞지 않고 땅을 얻었다. 교과서는 그 땅을 '강동6주'라 부른다. 흥화진은 의주, 용주는 용천, 통주는 선천, 철주는 철산, 곽주는 곽산, 귀주는 구성. 모두 지금의 평안북도다. 우리가 배운 강동6주 (연두색) 갑자기 웃긴 생각이 든다. 저 지도의 연두색 영역이 강동6주가 맞다면 명칭이 '강하6주'가 정확하지 않는가? 그런데 역사는 '강동6주'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희는 무엇을 말했는가 성종 12년(993) 10월, 거란 장수 소손녕이 쳐들어왔다. 소손녕은 글을 보내 "80만 군사가 이르렀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려 조정은 흔들렸다.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고 황주에서 절령까지를 경계로 삼자는 말까지 나왔다. 서희가 반대했다.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까지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이 차지하고 있던 곳입니다. 광종께서 이를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온 뜻은 이 두 성을 빼앗으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고려사』 권94, 열전7 서희) 이 말을 기억해 두자. 뒤에서 다시 꺼낼 것이다. 서희는 국서를 들고 적진으로 갔다. 소손녕이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 너희가 침범했다"고 말하자 서희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 땅의 경계를 따진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 안에 있다. 어찌 침범이라 하는가. 또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

④ 고대의 압록강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이 맞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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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글에서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 아니었다고 소개하였다. 그렇다면 고대의 압록강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이 맞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한다. 아니었다. 고구려와 고려 사람들이 "압록강"이라 부르던 강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압록강이 아니었다. 유득공의 의심 그리고 삼국유사의 기록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의 이야기였다. 조선 후기 유득공은 『발해고』를 쓰는 내내 뭔가 찜찜해 하고 있었다. 자신이 생존해 있던 조선 후기의 압록강(鴨綠江)을 고려시대의 국경선으로 대입한 상태에서 발해사를 연구하자니 지리고증에서 아귀가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혹시 봉황성 서쪽에 또 다른 압록강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아래 지도에서 봉황성의 위치를 확인해 보자. 고대 압록강과 평양의 위치 지금의 압록강을 고려의 국경으로 놓고 발해사를 짜 맞추려 하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득공은 봉황성 서쪽 어딘가에 "또 다른 압록강"이 있었을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옳았다. 유득공이 미처 다 풀어내지 못했던 근거가 『삼국유사』에 있었다. 『삼국유사』에서는, " 고구려 때의 도읍은 안시성(安市城) 일명 안정홀(安丁忽)로서 요수(遼水)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요수는 일명 압록(鴨淥)으로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고 부른다 "고 되어 있다. — 『삼국유사』 권3 흥법 「순도조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 p.139~140 재인용) 이 기록에서 고구려 때의 도읍을 안시성이라고 한 부분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 안시성이 평양성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시성이라면 다른 기록들과 맞지 않는다. 다만 이 기록에서 중요한 부분은, 고려 사람 일연이 요수를 일명 압록이라 하고 그때 이미 안민강이라 불렀다고 적었다는 것이다.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