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고대의 압록강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이 맞는가?

나는 지난 글에서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 아니었다고 소개하였다. 그렇다면 고대의 압록강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이 맞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한다. 아니었다. 고구려와 고려 사람들이 "압록강"이라 부르던 강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압록강이 아니었다.

유득공의 의심 그리고 삼국유사의 기록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의 이야기였다. 조선 후기 유득공은 『발해고』를 쓰는 내내 뭔가 찜찜해 하고 있었다. 자신이 생존해 있던 조선 후기의 압록강(鴨綠江)을 고려시대의 국경선으로 대입한 상태에서 발해사를 연구하자니 지리고증에서 아귀가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는 혹시 봉황성 서쪽에 또 다른 압록강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아래 지도에서 봉황성의 위치를 확인해 보자.

고대 압록강과 평양의 위치
고대 압록강과 평양의 위치

지금의 압록강을 고려의 국경으로 놓고 발해사를 짜 맞추려 하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득공은 봉황성 서쪽 어딘가에 "또 다른 압록강"이 있었을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옳았다.

유득공이 미처 다 풀어내지 못했던 근거가 『삼국유사』에 있었다.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 때의 도읍은 안시성(安市城) 일명 안정홀(安丁忽)로서 요수(遼水)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요수는 일명 압록(鴨淥)으로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고 부른다"고 되어 있다.

— 『삼국유사』 권3 흥법 「순도조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 p.139~140 재인용)

이 기록에서 고구려 때의 도읍을 안시성이라고 한 부분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 안시성이 평양성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시성이라면 다른 기록들과 맞지 않는다. 다만 이 기록에서 중요한 부분은, 고려 사람 일연이 요수를 일명 압록이라 하고 그때 이미 안민강이라 불렀다고 적었다는 것이다. 고려 때의 압록이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 쪽의 강이었다는 증언이다.

『요사』 속의 압록강 — 야율아보기의 낚시

두 번째 근거는 뜻밖에도 거란(요)의 정사 『요사』에 있었다. 『요사』 본기에는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아직 나라 이름과 연호를 정식으로 세우기도 전인 천복(天復) 9년(909년) 겨울, 압록강에서 낚시를 했다는 짧은 기록이 남아 있다.

『요사』에는 태조(야율아보기)가 천복(天復) 9년(909년) 겨울 10월에 압록강(鴨淥江)에서 낚시를 하였다고 되어 있다.

—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 p.139

책은 이 짧은 기록 하나를 근거로 삼기 전에, 909년이라는 시점이 갖는 의미를 짚는다. 거란은 903년과 906년 두 차례 요하 상류의 북여진을 정벌했고, 908년에는 진동(鎭東) 바닷가에 장성을 쌓았으며, 909년에야 태조가 직접 요동에 행차했다. 요동으로 통하는 길이 완전히 뚫린 것은 911년, 해(奚)와 습(霫)을 멸망시킨 뒤였다. 그리고 당시 지금의 북한 압록강 유역은, 거란의 적국인 발해가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발해가 멸망한 것은 그로부터도 17년이 지난 926년이다. 말하자면 909년의 야율아보기는, 아직 적국 발해의 영토 깊숙한 곳, 북한 압록강 유역까지 들어가 유유자적 낚시를 즐길 처지가 아니었다. 그해 그가 겨우 손에 넣은 곳은 요하 상류 일대뿐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낚시를 한 "압록강"은, 당시 거란이 실제로 확보하고 있던 요하 상류의 어느 구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편이 이치에 맞는다.

학자들의 결론

『압록과 고려의 북계』에 실린 여러 연구자의 결론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남의현(2016)은 다음과 같이 썼다.

명청 이전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압록강으로 불리지 않았다. 요하에 비하여 현재의 압록강은 그 지명의 역사가 분명하지 않고 평야가 없으며 자유롭게 항행할 수도 없어서 요하에 비하여 강의 활용가치도 높지 않다. 제반 기록을 검토할 때 고구려와 고려 시대의 압록강/압록수는 현재 한반도 북부의 압록강이 아니라 중국 만주 지역의 요하의 한 지류 또는 요하의 한 구간에 대한 명칭으로 볼 수 있다.

—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 p.138

복기대(2017)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정리했다.

요하는 고구려나 고려에서는 요하로 부르지 않고 압록강으로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안민강(安民江)으로 불렀다. 고구려 장수왕이 옮기고, 평원왕이 옮긴 장안성의 위치는 오늘날 중국 요령성 '요·심 일대'로서, 곧 고구려 평양은 요하의 북쪽지역 곧 요양일대라고 추정하였다.

—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 p.137

평양이 요양이었다는 지난 글의 이야기와, 압록강이 요하였다는 이번 글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의 결론이 두 개의 증거로 겹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압록강은 어디에

정리해 보면 이렇다. 『삼국유사』는 요수를 일명 압록이라 불렀다고 스스로 기록했고, 『요사』는 거란 태조가 아직 발해를 정복하기 전인 909년에 압록강에서 낚시를 했다고 기록해, 그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일 수 없음을 스스로 증언한다. 유득공이 발해사를 연구하며 품었던 의심은, 그가 미처 다 풀지 못했을 뿐 방향은 정확했다. 고구려와 고려의 압록강은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 혹은 그 지류 어느 구간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평양이 요양이었던 것처럼.

지난 글에서도 그랬듯, 나는 이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것이 부끄럽다. 그리고 이 부끄러움은, 아마 다음 글에서도 계속될 것 같다.

다음 편에서

평양이 요양이었고 압록강이 요하였다면, 을지문덕이 수나라 30만 대군을 무너뜨린 살수는 과연 지금의 청천강이었을까? 다음 편에서 살수대첩이 어디에서 벌어졌는지 찾아간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⑤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상) — 세 나라의 기록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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