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하) — 살수는 혼하다

지난 글 「⑤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상) — 세 나라의 기록」에서 나는 『삼국사기』와 『수서』, 『환단고기』가 적은 살수대첩을 읽었다. 그리고 하나의 물음에 이르렀다.

살수는 압록수와 평양 사이를 흐르는 강이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지금의 요양이고 고구려의 압록이 지금의 요하라면, 살수는 요하와 요양 사이 어딘가를 흐르는 강이어야 한다. 이번 글에서는 그 강을 찾아간다.

450리는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인가?

기록은 살수에서 무너진 수나라 군사가 하루 낮 하룻밤 만에 450리를 달아나 압록수에 이르렀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 450리는 얼마나 먼 거리일까. 수·당 때의 1리가 몇 미터였는지는 견해가 갈린다. 가장 짧게 잡는 견해는 1리를 약 323m로 본다. 이렇게 잡아도 450리는 약 145km다.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직선거리와 비슷하다. 1리를 더 길게 잡으면 거리는 더 늘어난다.

옛 군대는 하루에 얼마나 걸었을까. 옛사람들은 군대가 하루에 가는 거리를 30리로 잡고, 이를 '한 사(舍)'라 불렀다. 『춘추좌전』의 '퇴피삼사(退避三舍)', 곧 "삼 사를 물러난다"는 말은 사흘 거리인 90리를 물러난다는 뜻이다. 450리는 보통 군대의 보름 치 길이다.

가장 빠른 기병의 기록도 있다. 『삼국지』 「선주전」에는 조조가 유비를 쫓을 때의 일이 나온다.

조조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급히 쫓아, 하루 낮 하룻밤에 300여 리를 갔다. (曹公將精騎五千急追之 一日一夜行三百餘里)

(『삼국지』 「촉서」 선주전)

짐을 버리고 말을 탄 정예 기병이 달려도 하루 낮 하룻밤에 300여 리였다. 그래서 이 기록은 오늘까지 놀라운 속도의 본보기로 전해진다.

살수에서 무너진 수나라 군사는 어땠는가. 『삼국사기』는 그들이 이미 군량이 떨어져 굶주린 기색이 있었고,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지쳐 있었다고 적었다. 강을 건너다 기습을 당해 무너졌고, 뒤에는 고구려군이 쫓아오고 있었다. 대부분은 말이 아니라 두 발로 달아나는 보병이었을 것이다. 그런 군사가 조조의 정예 기병보다 1.5배나 멀리, 하루 낮 하룻밤에 145km 넘게 달아났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450리는 과장이거나, 여러 날에 걸친 패주를 한 문장으로 줄여 적은 것이다. 따라서 450리라는 거리로 살수의 자리를 재서는 안 된다. 살수의 자리는 거리가 아니라 기록에 나오는 강의 순서로 따져야 한다.

남는 것은 강의 순서다. 수나라 군사는 압록수(지금의 요하)를 건넌 뒤 다시 살수를 건너 평양성(요양) 30리 앞에 진을 쳤다. 그렇다면 살수는 요하와 요양 사이에서 찾아야 한다.

그 강이 어느 강인지는 뒤에서 따져 보겠다.
먼저 살수를 요동에서 찾은 다른 사람들의 견해부터 살펴보자.

살수를 요동에서 찾는 사람들

지난 글에서 본 대로 『환단고기』 역주본의 주석에 따르면 이덕수는 대양하를, 정인보는 개평의 주남하를 살수로 보았다. 둘 다 요동반도의 강이다.

북한 학계도 살수를 청천강으로 보지 않는다.

살수에 대해 남한 강단사학계는 지금의 청천강이라고 보고 있으나 북한학계는 요동반도에서 바다로 흐르는 대양하의 지류인 소자하(초자하)로 보고 있다.

(이덕일, 『이덕일의 한국통사』, p.176~177)

소자하는 요령성 안산시 수암현에서 발원한다. (같은 책, p.81) 이덕수의 대양하와 같은 물줄기다.

살수는 혼하다
살수는 혼하다

지도에서 보듯 살수의 자리를 두고 여러 견해가 있다.
교과서의 청천강, 이덕수의 대양하와 북한 학계의 소자하, 정인보의 주남하. 청천강을 빼면 모두 요동이다. 그러나 대양하·소자하·주남하는 모두 요양의 남쪽 요동반도에 있다. 요하를 건너 요양으로 가는 길목에는 놓여 있지 않다.

살수는 혼하다

나는 여러 기록을 검토한 끝에 살수를 지금의 혼하(渾河)로 생각한다.
혼하는 무순에서 나와 심양의 남쪽을 지나, 요양의 북서쪽을 흘러 남서쪽으로 내려가는 강이다.
그 근거는 이렇다.

첫째, 평양은 요양이고 압록수는 요하다.

「③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어디인가?」에서 본 대로, 『요사』와 『원사』는 장수왕의 평양이 지금의 요양이라고 적었다. 압록수는 어떤가. 남주성 교수는 『고려도경』과 『성경강역고』를 엮어 이렇게 결론지었다.

고구려 당시에 요수(遼水)는 강물의 폭이 좁고 얕은 대릉하로 인식하고 있었다. 반면 압록강은 강폭도 넓고 깊은 강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의 압록강은 오늘날의 요하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 p.142)

『신당서』의 645년 기사도 같다. 당나라 장수 이적은 '요수'를 건너 요동성을 치고, 정명진은 '압록수' 위에서 기다렸다. (『신당서』 동이열전 고구려 —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40 재인용) 612년 기록처럼 요수와 압록수는 서로 다른 강이었다.
고구려의 압록도, 고려의 압록도 지금의 요하다.

👉 관련 글 바로가기 ④ 고대의 압록강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이 맞는가?

둘째, 요하와 요양 사이를 흐르는 큰 강은 혼하다.

수나라 군사는 압록수를 건너 살수를 건너고 평양성 앞에 이르렀다. 요하에서 요양으로 가는 길에는 큰 강이 둘 있다. 혼하와 태자하다. 태자하는 요양 바로 곁을 너무 가깝게 흐른다. 요하를 건넌 군대가 요양에 이르기 전에 만나는 큰 강은 혼하다.

셋째, 방향이 맞는다.

『삼국사기』 열전은 수나라 군사가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넜다(遂進東 濟薩水)"고 적었다. (『삼국사기』 권44, 열전4 을지문덕) 수나라의 기록인 『수서』 「우문술전」도 "東濟薩水", 곧 동쪽으로 살수를 건넜다고 적었다. 두 나라의 기록이 방향을 똑같이 말한다. 요하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면 곧 혼하를 만난다. 교과서대로라면 수나라 군사는 지금의 압록강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청천강을 건너야 한다. 기록의 '동쪽'과 맞지 않는다.

넷째, 평양성 30리 앞의 진과 맞는다.

수나라 군사는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30리는 약 10~16km다. 혼하는 요양에서 직선으로 약 20~45km 떨어져 흐른다. 혼하를 건너 요양 쪽으로 조금 더 나아가 진을 쳤다고 보면 기록과 맞는다. 태자하는 요양 바로 곁이라, 건너면 이미 성 앞이다.

다섯째, 하루 낮 하룻밤의 패주와 맞는다.

혼하에서 요하까지는 직선으로 30km 남짓이다. 실제로 달아난 길은 이보다 더 길었을 것이다. 그래도 목숨을 걸고 밤새 달리면 하루 낮 하룻밤에 닿을 수 있는 거리다. 앞에서 본 대로 '450리'는 과장이지만, '하루 낮 하룻밤 만에 압록수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혼하에서 요하까지라면 사실일 수 있다.

여섯째, 수나라 군사가 죽은 자리가 요하 가에 남아 있다.

신채호는 요하를 건너면 길이 2백 리에 이르는 진펄인 '요택(遼澤)'이 있다고 했다. 당 태종의 조서에 요택에 전사자들의 뼈를 묻었다는 말이 있어, 수나라 군사들이 이 땅에서 많이 죽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도 대개 고구려군의 추격으로 인해 죽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제9편 제2장) 쫓기는 수나라 군사가 요하 가의 진펄에서 쓰러졌다면, 그들이 달아난 길은 혼하에서 요하로 이어지는 길이다.

여섯 가지 근거가 한 곳을 가리킨다. 살수는 혼하다.

다만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혼하를 '살수'라고 직접 적은 옛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이것은 기록에 나오는 강의 순서와 방향, 거리를 지리에 맞추어 내가 내린 결론이다.

글을 마치며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현재의 요양이고 고구려의 압록이 현재의 요하라면 살수는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이다. 수나라의 기록이나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군대가 움직인 방향을 따라가면 살수는 현재의 혼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귀주대첩의 다하와 타하가 지금 철령의 시하와 범하로 흐르고 있는 것처럼, 을지문덕의 살수는 지금 혼하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⑦ 고대의 요수는 어디였나? (상)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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