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라벨이 위화도 회군인 게시물 표시

⑫ 위화도 회군, 사대주의가 나라를 세우다

지난 글 「 ⑪ 이성계는 왜 위화도에서 돌아섰나? 」를 나는 이렇게 마쳤다. 땅은 잃었다가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나라의 시작부터 자주성을 내려놓은 나라는 어떻게 되는가? 이번 글은 그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이다. 우리 역사에서 제일 비극적인 사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불렀다. 독립당과 사대당의 싸움에서 사대당이 이기면서 우리 역사가 진취의 기상을 잃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묘청이 진 뒤에도 고려는 자주를 잊지 않았다. 공민왕은 원나라에 빼앗긴 땅을 되찾았고, 우왕과 최영은 명나라 연호를 버리고 요동으로 군대를 보냈다. 꺾인 기상은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그 기상을 다시 꺾은 것이 위화도 회군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꺾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회군을 이끈 사람이 새 나라를 세웠다. 묘청의 난에서 이긴 사대의 논리가, 이제 한 나라의 뼈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위화도 회군과 조선의 건국을 우리 역사에서 제일 비극적인 사건으로 부른다. 나라 이름을 황제에게 물었다 1392년 7월,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해 11월, 그는 한상질을 명나라 서울 남경으로 보냈다. 새 나라의 이름을 정해 달라는 글을 함께 보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선과 화령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태조실록』 태조 1년 11월 29일) 석 달 뒤인 1393년 2월 15일, 답이 왔다. 동이(東夷)의 국호에 다만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태조실록』 태조 2년 2월 15일, 명 예부의 자문) 이성계는 명나라 황제의 궁궐 쪽을 향해 은혜를 사례하는 절을 올렸다. 한상질에게는 밭 50결을 내렸다. 그리고 온 나라에 교...

⑪ 이성계는 왜 위화도에서 돌아섰나?

지난 글 「 ⑩ 철령위는 어디였나? 」에서 나는 명나라의 정사가 남긴 한 줄을 소개했다. 동남쪽에 봉집현이 있으니 곧 옛 철령성이다. 고려와 경계를 맞댄다. (東南有奉集縣 即古鐵嶺城也 接高麗界) (『명사』 권41, 지리지 요동도지휘사사 철령위) 명나라가 1388년 3월 철령위를 세운 곳은 함경남도가 아니었다. 지금의 심양 남쪽, 고려와 경계를 맞댄 요동이었다. 명나라 스스로 그렇게 적었다. 그해 4월, 고려의 군대가 그 요동을 향해 평양을 떠났다.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이끄는 3만 8천여 명이었다. 그리고 한 달 뒤, 그 군대는 압록강의 작은 섬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이성계는 왜 돌아섰을까? 그리고 그가 돌아서지 않았다면 요동은 우리 땅이 되었을까? 봉주의 '네 가지 불가' 1388년 4월 1일, 우왕은 봉주에서 최영과 이성계를 불렀다. "내가 요양을 치려 하니 경들은 힘을 다하라." 이성계는 반대했다. 지금 군사를 내는 데에는 네 가지 불가한 것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이 첫째 불가입니다.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둘째 불가입니다. 나라를 들어 멀리 정벌하면 왜구가 그 빈틈을 탈 것이 셋째 불가입니다. 때가 바야흐로 덥고 비가 오는 철이라 활의 아교가 풀리고 큰 군대가 역병을 앓을 것이 넷째 불가입니다. (以小逆大 一不可 夏月發兵 二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四不可) (『고려사』 권137, 열전50 신우 14년 4월) 네 가지 가운데 둘째부터 넷째까지는 때와 형편의 문제다. 장수라면 당연히 따져야 할 일이다. 그런데 첫째는 다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불가하다." 이것은 전술이 아니라 나라를 보는 눈이다. 이성계는 그 눈을 맨 앞에 두었다. 흔히 위화도에서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이 '네 가지 불가'는 출병 전 봉주에서 처음 한 말이고, 위화도에서도 같은 이유를 되풀이했다. 이성계는 서경에 머물렀다가...

⑧ 묘청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하편)

1135년 정월, 묘청은 분사시랑 조광, 병부상서 유참 등과 함께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임금을 버린 반란이었나 그런데 이 반란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서경 쪽은 새 임금을 세우지 않았다. 이덕일은 이것을 인종을 황제로 받들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p.248) 개경에서 사신이 오자 서경의 장수들은 군복 차림으로 뜰에 내려와 절했다. 왕의 안부를 묻고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편지 한 통을 주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입니다." (『고려사』 권127, 묘청전) 이어 서경이 올린 표문은 더 분명하다. 폐하께서는 음양의 지극한 말을 믿고 대화궁을 지으셨으니, 천하의 황제가 머물 도읍을 만드신 것입니다. … 그런데 신하들이 임금의 마음을 본받지 않고 자기 고향 땅만 생각하여 천도를 주저하고 가로막을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 폐하께서 수레를 타고 오신다면 병기를 버리고 싸움을 멈출 것입니다. 서경이 겨눈 것은 왕이 아니었다. 왕을 붙잡고 있는 개경의 신하들이었다. 개경의 신하들은 "신하가 임금을 부르니 그 사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종은 사자에게 술과 비단을 내리고 벼슬까지 주어 돌려보냈다. 김부식은 정지상부터 죽였다 김부식은 서경에서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기 전, 재상들에게 말했다. "서경의 반역은 정지상·김안·백수한이 함께 꾸민 것이다. 이들을 없애지 않으면 서경을 평정할 수 없다." 그리고 세 사람을 궁문 밖으로 끌어내 목을 벤 뒤에 왕에게 알렸다. (『고려사』 권98, 김부식전) 『고려사』는 당시 사람들의 말도 함께 적어 두었다. 김부식은 평소 정지상과 문장으로 이름을 다투었는데, 쌓인 불만 때문에 이때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고려사』 권127, 묘청전)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묘청이 왕명 없이 국호를 고치자 정지상은 왕 곁에서 묘청을 반대했다고 했다. (『조선상고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