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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철령위는 어디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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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 ⑨ 공민왕은 왜 요동을 쳤나? 」에서 나는 1370년 이성계가 압록강을 건너 요양을 친 이야기를 따라갔다. 그로부터 18년 뒤, 이성계는 다시 압록강에 섰다. 이번에는 건너지 않았다.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렸다. 위화도 회군이었다. 그 회군의 배경에 철령위가 있다. 따라서 위화도 회군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령위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 교과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에 붙이겠다고 통보했다. 우왕과 최영은 이에 맞서 요동 정벌을 결정했다. 그리고 그 철령은 함경남도 안변과 강원도 회양 사이에 있는 고개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철령」 — 이덕일, 『도둑 맞은 한국사』, p.205~206 재인용)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명나라가 함경남도에 철령위를 세우려 했다면 고려 군사는 동쪽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고려 군사는 북쪽 압록강으로 갔다. 명나라는 철령위를 정말 어디에 세웠을까? 그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명나라는 왜 하필 1388년에 이 문제를 들고 나왔을까? 명나라는 왜 1388년에 철령을 들고 나왔나 원나라는 쫓겨났지만 요동은 남아 있었다 1368년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웠다. 원나라는 몽골 초원으로 물러났다. 이를 북원이라 부른다. 그러나 요동은 바로 명나라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1371년 『고려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북원의 요양성 평장 유익과 왕우승 등이 명나라에 귀부하려 하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백성을 다른 곳으로 옮길까 염려하였다. 요양은 본래 우리 땅이니 우리나라가 청하면 옮기는 것을 면할 수 있을까 하여 사신을 보내 알려 왔다. (北元遼陽省平章劉益王右丞等欲歸附大明 慮遷居民 以遼陽本我地 若我國請命 可免遷徙 遣使來告) (『고려사』 권43, 공민왕 20년 윤3월) 요양의 원나라 관리들이 고려에 도움을 청하며 내세운 까닭은 "요양은 본래 우리(고려) 땅"이라는 것이었다. 「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에서 살펴본 대로 요양은 고려...

⑨ 공민왕은 왜 요동을 쳤나?

지난 글 「 ⑧ 묘청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하편) 」 끝에서 나는 물었다. 작은 나라는 자신들의 연호도 가질 수 없고,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정말 불가한 일인가? 그 물음의 답을 찾으려면 1370년의 압록강으로 가야 한다. 1370년 정월, 동북면의 장수 이성계가 기병 5천과 보병 1만을 이끌고 황초령을 넘었다. 600여 리를 가서 설한령에 이르렀고, 다시 700여 리를 가서 압록강을 건넜다. 그날 저녁 서북쪽 하늘에 자줏빛 기운이 가득했다. 하늘을 살피는 서운관은 "용맹한 장수의 기운"이라고 했다. 공민왕은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이성계를 보냈으니, 필히 그에 대한 응험이다. (『고려사』 권42, 공민왕 19년 정월) 요동을 치러 압록강을 건넌 이 장수가, 18년 뒤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린 바로 그 이성계다. 공민왕은 왜 요동을 쳤을까? 그리고 고려는 그 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원나라 때 빼앗긴 땅 묘청의 난이 끝난 뒤 고려는 무신정변을 겪었다. 이어 몽골이 쳐들어왔다. 40년 가까이 싸운 끝에 고려는 원나라와 강화했다. 그 과정에서 북쪽 땅을 두 번 잃었다. 동북쪽: 1258년 원나라는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두고 그 북쪽을 직접 다스렸다. 서북쪽: 1269년 서경의 최탄 등이 서경과 여러 성을 들어 몽골에 항복했다. 몽골은 그곳에 동녕부를 두었다. (「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 원나라의 정사 『원사』는 동녕로를 요양행성 아래에 두었다. 동녕부는 요양, 곧 요하 동쪽에 있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의현, pp.286~288) 땅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고려의 임금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해야 했다. 임금의 이름 앞에는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의 '충(忠)' 자가 붙었다. 고려는 자기 연호 대신 원나라의 연호를 썼다. 그 틈에서 원나라에 기대어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가장 큰 이가 기철이다. 그의 동생은 원나라 순제의 황후, 기황후였다. 공민왕은 뒤에 이렇게 말했다. 기철 등은 임금을 떨...

⑧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였는가? (하편) — 고조선 중기 이후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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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편에서 나는 진개가 고조선 땅 2천여 리를 빼앗은 뒤 고조선이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 진개의 공격 이후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인가? 이 글은 두 갈래로 나누어 살핀다. 먼저 국경을 기록으로 보고, 다음에 수도를 유물로 본다. 국경은 중국 사서가 자세히 적었다. 그러나 고조선의 중심을 적은 같은 시대의 기록은 없다. 그래서 수도는 땅에 남은 흔적으로 찾을 수밖에 없다. 고조선 말기의 서쪽 국경 『위략』은 한나라 초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고 적었다. 위만도 이 패수를 "동쪽으로" 건너 조선에 들어왔다. 패수는 고조선 말기의 서쪽 국경이었다. 여기서 시기를 분명히 해 둔다. 나는 「 ⑤ 갑골문에 나오는 방은 어느 나라인가? 」에서 상나라 때 고조선은 베이징과 하북 일대에서 상나라와 맞섰고, 난하와 갈석산이 경계가 된 것은 진시황의 통일 뒤라고 썼다. 『위략』의 이 기록은 그보다 뒤, 한나라 초의 일이다. 그러니 이 글에서 말하는 패수는 고조선 말기의 국경이다. 패수가 어느 강인지에 대해서는 대동강설, 대릉하설, 난하설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러나 나는 「 ⑦ 고대의 요수는 어디였나? (상) 」에서 고대의 요수가 지금의 난하였다고 이미 썼다. 요수는 '먼 강', 곧 국경을 이루는 강의 이름이었다. 패수도 마찬가지로 국경의 강이었다. 나는 고대의 요수와 패수가 모두 난하 일대를 가리킨다고 본다. 난하의 서쪽에는 또 하나의 강이 있다. 북경 동북쪽 밀운에서 고북구로 이어지는 조하(潮河)다. 『환단고기』 역주본은 패수를 "지금의 조하"라고 풀었다. 그런데 이 조하의 옛 이름이 흥미롭다. 송나라 때 편찬된 『무경총요』는 연경(지금의 북경)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을 이렇게 적었다. "단주에서 … 산으로 들어가면 길이 구불구불하여 다시는 이정표가 없다. 조선하를 건너 90리를 가면 고북하구에 이른다." 밀운에서 고북구...

④ 배달국과 단군을 다시 읽다 (하) — 유물이 말하는 곳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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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 ③ 배달국과 단군을 다시 읽다 (상) 」에서 나는 기록을 읽었다. 『삼국유사』와 『환단고기』는 세부 내용이 다르지만 함께 말하는 뼈대가 있었다. 환웅의 무리가 신시를 열었고, 곰을 섬기는 무리와 하나가 되었고, 그 뒤 단군이 요임금 무렵에 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에만 의존하면 그 일이 지금의 어디에서 있었는가 분명히 알 수 없다. 단군의 첫 도읍은 기록마다 평양성, 아사달, 송화강 아사달로 달랐다. 그래서 나는 이런 물음은 땅에 남은 유물에 묻기로 했다. 이번 하편에서는 배달국과 단군의 유물을 따라 찾아가 본다. 배달은 어디에 있었나 「삼성기전」은 환웅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와 신시에 도읍했다고 적었다. 14세 치우천황은 도읍을 청구로 옮겼다. 그러나 백산과 흑수, 신시와 청구가 지금의 어디인지는 기록만으로 알 수 없다. 배달의 시대에 곰을 섬기고, 하늘에 제사 지내고, 다스리는 자가 있었던 사람들은 어디에 살았을까. 그 답이 홍산문화다. 나는 「 ② 요하문명과 홍산문화 」에서 이 문화를 자세히 소개했다. 홍산문화는 기원전 4500년에서 3000년 무렵의 문화다. 중심은 내몽골의 적봉에서 요녕성의 조양에 이르는 땅이다. 가장 큰 유적인 우하량은 조양의 건평현에 있다. 기록과 유물을 나란히 놓아 보면 이렇다. 기록이 말하는 배달 홍산문화의 유물 환웅은 웅씨족 여인을 황후로 삼았다 무덤에 곰의 뼈를 묻고, 신전 한가운데에 흙으로 빚은 곰을 모셨다 하늘을 내세운 환웅이 신시를 열었다 우하량에 제단·신전·무덤이 한자리에 갖추어져 있다 환웅천황이 나라를 다스렸다 옥기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나뉘었음을 보여 준다 배달은 기원전 3897년에 시작되었다 (역주본의 계산) 홍산문화는 기원전 4500년부터 3000년 무렵까지 이어졌다 우하량의 제단·신전·무덤은 당시 강력한 고대국가가 등장했음을 말해 준다. 중국의 고고학자 소병기는 나라가 고국(古國)에서 방국(方國), 제국(帝國)으로 발달한다고 보았다. ...

⑥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하) — 살수는 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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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⑤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상) — 세 나라의 기록」 에서 나는 『삼국사기』와 『수서』, 『환단고기』가 적은 살수대첩을 읽었다. 그리고 하나의 물음에 이르렀다. 살수는 압록수와 평양 사이를 흐르는 강이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지금의 요양이고 고구려의 압록이 지금의 요하라면, 살수는 요하와 요양 사이 어딘가를 흐르는 강이어야 한다. 이번 글에서는 그 강을 찾아간다. 450리는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인가? 기록은 살수에서 무너진 수나라 군사가 하루 낮 하룻밤 만에 450리를 달아나 압록수에 이르렀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 450리는 얼마나 먼 거리일까. 수·당 때의 1리가 몇 미터였는지는 견해가 갈린다. 가장 짧게 잡는 견해는 1리를 약 323m로 본다. 이렇게 잡아도 450리는 약 145km다.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직선거리와 비슷하다. 1리를 더 길게 잡으면 거리는 더 늘어난다. 옛 군대는 하루에 얼마나 걸었을까. 옛사람들은 군대가 하루에 가는 거리를 30리로 잡고, 이를 '한 사(舍)'라 불렀다. 『춘추좌전』의 '퇴피삼사(退避三舍)', 곧 "삼 사를 물러난다"는 말은 사흘 거리인 90리를 물러난다는 뜻이다. 450리는 보통 군대의 보름 치 길이다. 가장 빠른 기병의 기록도 있다. 『삼국지』 「선주전」에는 조조가 유비를 쫓을 때의 일이 나온다. 조조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급히 쫓아, 하루 낮 하룻밤에 300여 리를 갔다. (曹公將精騎五千急追之 一日一夜行三百餘里) (『삼국지』 「촉서」 선주전) 짐을 버리고 말을 탄 정예 기병이 달려도 하루 낮 하룻밤에 300여 리였다. 그래서 이 기록은 오늘까지 놀라운 속도의 본보기로 전해진다. 살수에서 무너진 수나라 군사는 어땠는가. 『삼국사기』는 그들이 이미 군량이 떨어져 굶주린 기색이 있었고,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지쳐 있었다고 적었다. 강을 건너다 기습을 당해 무너졌고, 뒤에는 고구려군이 쫓아오고 있었다. 대부분은 말이 아니라 두 발로 달아나는 ...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지난 글 「 ⑤ 귀주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까지 세 편에 걸쳐 나는 서희의 강동6주와 귀주대첩의 자리를 따라갔다. 그런데 그 세 편에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었다. 고려의 서경은 지금의 요령성 요양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전제를 당연한 것처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정면으로 따져 본 적은 없다.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교과서가 말하는 서경 교과서는 고려의 서경을 지금 북한의 평양이라고 가르친다. 근거는 『고려사』 지리지다. 『고려사』는 서경을 '서경유수관 평양부'라 하고, 본래 고구려 장수왕이 도읍한 평양이라고 적었다. (『고려사』 권58, 지리지 북계 서경유수관 평양부) 여기까지는 다툴 것이 없다. 고려의 서경은 고구려의 평양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교과서는 고구려의 평양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라고 본다. 그래서 고려의 서경도 지금 북한의 평양이 된다. 나는 「 ③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어디인가? 」에서 그 평양이 지금의 요양이라고 썼다. 그렇다면 고려의 서경도 요양이어야 한다. 이번에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고려시대의 기록으로 이것을 확인해 보려 한다. 고려의 서경을 차지한 나라의 기록 1269년 서경의 최탄 등이 북계의 60여 성을 들어 몽골에 항복했다. 몽골은 서경에 동녕부를 두었다. 고려의 서경을 20년 가까이 직접 다스린 나라가 바로 원나라다. 그 원나라의 정사 『원사』 지리지는 동녕로를 이렇게 적었다.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성을 함락한 이후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겨갔다. 압록수 동남 천여 리에 있는 것은 옛 평양이 아니다. 왕건에 이르러 평양을 서경으로 하였다. … 8년(1271) 서경을 동녕부로 고쳤다. (『원사』 지리지 동녕로 — 『압록과 고려의 북계』, p.146 재인용) 이 기록은 세 가지를 한꺼번에 말한다. 동녕로는 고구려의 평양성이었다. 그곳이 고려의 서경이었다. 그리고 "압록수 동남 천여 리에 있는 것", 곧 지금 우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