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였는가? (하편) — 고조선 중기 이후의 수도

상편에서 나는 진개가 고조선 땅 2천여 리를 빼앗은 뒤 고조선이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 진개의 공격 이후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인가?

이 글은 두 갈래로 나누어 살핀다. 먼저 국경을 기록으로 보고, 다음에 수도를 유물로 본다. 국경은 중국 사서가 자세히 적었다. 그러나 고조선의 중심을 적은 같은 시대의 기록은 없다. 그래서 수도는 땅에 남은 흔적으로 찾을 수밖에 없다.

고조선 말기의 서쪽 국경

『위략』은 한나라 초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고 적었다. 위만도 이 패수를 "동쪽으로" 건너 조선에 들어왔다. 패수는 고조선 말기의 서쪽 국경이었다.

여기서 시기를 분명히 해 둔다. 나는 「⑤ 갑골문에 나오는 방은 어느 나라인가?」에서 상나라 때 고조선은 베이징과 하북 일대에서 상나라와 맞섰고, 난하와 갈석산이 경계가 된 것은 진시황의 통일 뒤라고 썼다. 『위략』의 이 기록은 그보다 뒤, 한나라 초의 일이다. 그러니 이 글에서 말하는 패수는 고조선 말기의 국경이다.

패수가 어느 강인지에 대해서는 대동강설, 대릉하설, 난하설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러나 나는 「⑦ 고대의 요수는 어디였나? (상)」에서 고대의 요수가 지금의 난하였다고 이미 썼다. 요수는 '먼 강', 곧 국경을 이루는 강의 이름이었다. 패수도 마찬가지로 국경의 강이었다. 나는 고대의 요수와 패수가 모두 난하 일대를 가리킨다고 본다.

난하의 서쪽에는 또 하나의 강이 있다. 북경 동북쪽 밀운에서 고북구로 이어지는 조하(潮河)다. 『환단고기』 역주본은 패수를 "지금의 조하"라고 풀었다. 그런데 이 조하의 옛 이름이 흥미롭다. 송나라 때 편찬된 『무경총요』는 연경(지금의 북경)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을 이렇게 적었다.

"단주에서 … 산으로 들어가면 길이 구불구불하여 다시는 이정표가 없다. 조선하를 건너 90리를 가면 고북하구에 이른다."

밀운에서 고북구로 가는 길에 건너는 강, 그것이 지금의 조하다. 송나라 사람들은 그 강을 '조선하'라고 불렀다. 북경 동북쪽의 강에 '조선'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던 것은 그 강을 건너면 '조선' 땅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조하와 난하는 서로 다른 강이다. 조하는 난하보다 100~150km 서쪽에 있다. 그러나 두 강 모두 하북성 북부를 남북으로 흘러 발해로 들어간다. 패수가 난하였든 조하였든, 고조선 말기의 서쪽 국경은 하북성에 있었다. 지금의 대동강과는 너무 먼 곳이다.

고조선의 국경과 수도
고조선의 국경과 수도

국경 가까이에 선 중국의 군현

진개 이후 연나라와 진나라, 한나라는 이 국경 가까이에 군현을 두었다.

연나라 장성의 동쪽 끝은 양평이었다. (『사기』 흉노열전) 당나라의 이현은 『후한서』에 주석을 달면서 요동군의 양평 옛 성이 "지금의 평주 노룡현 서남쪽에 있다"고 적었다. 노룡은 난하 하류의 동쪽이다. 『수서』 배구전은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라고 했는데, 그 고죽국도 노룡 일대다.

『태강지리지』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적었다. 갈석산은 지금의 하북성 창려에 있다. 『사기』 주석에서 서광은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고 했다. (『사기』 권115, 조선열전 집해)

같은 주석에서 응소는 "요동군 험독현이 조선 왕의 옛 도읍"이라 했고, 신찬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 패수가 난하라면 패수의 동쪽은 난하 하류의 창려 일대가 된다. 세 주석이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킨다.

위만의 왕험성도 난하 근처, 창려 일대에 있었다. 또한, 한나라의 낙랑군도 난하 근처, 지금의 하북성에 있었다.

양평, 고죽국, 갈석산, 낙랑군의 수성현과 조선현, 그리고 위만의 왕험성(험독). 이 이름들이 모두 난하 하류 가까이, 노룡과 창려 일대에 모여 있다. 이곳은 고조선과 중국이 국경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다투던 땅이었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중기 이후, 수도는 어디였을까? 나는 그 답을 국경인 난하에서 훨씬 동쪽, 요하 건너편에서 찾는다.

기록이 멈추는 곳

요양 일대를 조선의 옛 땅으로 적은 기록은 많다.
『요사』 지리지는 요양을 "본래 조선의 땅"이라 했고, 『원사』 지리지는 개원 일대의 함평부를 "옛 조선의 땅"이라 했다. 조선 초에 엮은 『고려사』도 고려의 서경을 "본래 삼조선의 옛 도읍"이라 적었다. 나는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에서 이 서경이 요양이었다고 썼다.

그러나 나는 이 기록들을 고조선의 수도를 밝히는 근거로 쓰지 않는다.
『요사』는 원나라 때인 1344년에, 『원사』는 명나라 초인 1370년에, 『고려사』는 조선 초인 1451년에 엮었다. 고조선이 사라지고 천 년이 훨씬 넘게 지난 뒤다. 세 책 모두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적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요나라가 건국한 시대인, 고려 시대의 기록은 믿을 수 있지만 그보다 천년 전의 기록은 근거도 미약한 내용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의지할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유물을 본다. 아주 오래된 일은 땅에 남은 것이 가장 정직하다.

유물이 말하는 고조선의 수도

첫째, 고인돌이다. 요양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요동반도 북쪽의 해성과 개주가 있다. 이곳에 요동에서 가장 큰 탁자식 고인돌이 서 있다.

  • 개주 석붕산 고인돌: 덮개돌은 남북 8.6m, 동서 5.7m이고, 전체 높이는 3.1m다.
  • 해성 석목성 고인돌: 덮개돌은 남북 6m, 동서 5.1m이고, 전체 높이는 2.8m다.

이런 돌을 옮겨 세우려면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부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다만 이 고인돌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석붕산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또는 그보다 이른 신석기시대 후기의 것으로 본다.

둘째, 무덤과 비파형동검이다. 요양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심양이 있다. 심양의 정가와자 유적은 1958년부터 1965년 사이에 발굴되었다. 그 가운데 6512호 무덤은 무덤방이 가로 약 3m, 세로 약 5m이고, 50세가 넘은 남성이 묻혀 있었다. 비파형동검과 청동거울, 수레와 말갖춤 등 청동기만 400여 점이 나왔다. 토기와 석기를 합하면 900여 점이다. 이 무덤은 기원전 6~5세기 고조선 수장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정가와자 출토 유물
정가와자 출토 유물

셋째, 동검 문화가 옮겨 간 흐름이다. 강인욱 교수는 정가와자 6512호 무덤을 "기원전 8~7세기대에 요서지역에서 유행했던 십이대영자 유형의 비파형동검 문화가 요동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남긴 것"으로 본다. 십이대영자는 요서의 조양에 있다.

나는 「④ 배달국과 단군을 다시 읽다 (하)」에서 단군의 첫 도읍을 조양 일대로 보았다. 그 조양의 동검 문화가 요하를 건너 요동으로 옮겨 왔다. 그리고 요양을 가운데 두고 북쪽의 심양에는 수장의 무덤이, 남쪽의 해성과 개주에는 가장 큰 고인돌이 남았다. 나는 이것이 고조선 중기 이후의 중심이 요양 일대였다는 흔적이라고 믿는다.

위만이 빼앗은 땅, 단군이 다스린 땅

여기서 물음이 하나 남는다. 위만조선의 도읍이 창려였다면, 고조선의 수도가 요양 일대였다는 말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환단고기』는 이 물음에 실마리를 준다. 『환단고기』는 고조선을 진조선·번조선·막조선의 삼조선으로 나누어 적었다. 진조선은 단군이 직접 다스렸고, 번조선은 번한이, 막조선은 마한이 맡아 다스렸다. 위만이 빼앗은 것은 서쪽의 번조선이었고, 단군의 나라는 그 뒤 북부여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창려의 왕험성은 위만이 빼앗은 번조선의 도읍이었다. 단군이 다스린 고조선의 중심은 그보다 동쪽, 요양 일대에 있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대동강의 평양은 무엇이었나

학계의 이동설도 요동의 유물에서 출발한다.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기원전 4세기 무렵 연나라가 요령 지역으로 들어오자 후기 고조선의 중심이 대동강 지역으로 옮겨 갔다고 본다.

나는 고조선이 대동강 지역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까닭은 아래와 같다.

첫째, 기록이 없다. 상편에서 본 대로, 진개 이후 고조선이 수도를 천도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둘째, 고구려의 다물이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동명성왕 2년의 일을 이렇게 적었다.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그 땅을 다물도라 하고 송양을 봉하여 주인으로 삼았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되찾는 것을 다물이라 하므로 그렇게 이름 붙였다."

고구려는 나라를 연 이듬해부터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는다는 뜻, '다물'을 땅 이름에 새겼다.
나는 「③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어디인가?」에서 장수왕이 427년에 도읍을 옮긴 평양은 지금의 요양이라고 썼다. 고구려가 되찾고자 한 고조선의 중심이 대동강의 평양이었다면, 장수왕이 요양으로 갈 까닭이 없다. 나는 장수왕이 간 곳이 고조선의 옛 중심이었다고 믿는다.

셋째, 대동강 일대는 고조선의 한 축이었다. 대동강 유역과 황해도에도 고인돌이 많다. 황해도 관산리 고인돌은 개주 석붕산, 해성 석목성 고인돌과 견줄 만큼 크다. 상편에서 본 대로 세형동검도 많이 나온다. 대동강 일대는 고조선 사람들이 오래 살던 중요한 땅이었다. 그러나 큰 고인돌은 요동에도 있고 황해도에도 있었다. 수도가 옮겨 와서 생긴 땅이 아니라, 처음부터 고조선의 중요한 한 축이었던 것이다.

앞에서 본 삼조선으로 보면 대동강의 자리가 보인다. 『환단고기』 「마한세가」는 22세 색불루 단군이 삼한을 삼조선으로 고치고, 여원흥을 마한으로 삼아 막조선을 다스리게 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 간다.

"원흥이 임금의 명을 받고 대동강을 굳게 지키니, 이곳을 왕검성이라고도 불렀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대동강의 평양은 막조선을 다스린 마한의 도읍, 곧 고조선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고조선의 수도가 그리로 옮겨 간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 자리는 고조선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글을 마치며

고조선 말기의 서쪽 국경은 패수, 곧 지금의 난하였다.
위만의 왕험성과 한나라 낙랑군의 수성현·조선현은 난하 근처, 노룡과 창려 일대에 있었다.

고조선 중기 이후의 중심은 요하를 건너 요양 일대에 있었다. 기록은 이것을 말해 주지 못한다. 대신 땅이 말해 준다. 요양 남쪽 해성과 개주에는 요동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 서 있고, 북쪽 심양에는 고조선 수장의 무덤으로 보는 정가와자 6512호 무덤이 있다. 요서 조양의 비파형동검 문화는 요동 요양으로 옮겨 왔다.

진개에게 서쪽 땅을 잃은 뒤에도 고조선은 대동강으로 물러나지 않았다. 대동강의 평양은 고조선의 한 축이었을 뿐, 수도가 옮겨간 것이 아니었다. 위만 조선이 망한 뒤에도 고조선은 수도를 옮기지 않았다. 그리고 고조선의 중심이었던 요양 일대는 수백 년 뒤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되었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⑨ 고인돌은 왜 요하를 넘지 않았나?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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