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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묘청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하편)

1135년 정월, 묘청은 분사시랑 조광, 병부상서 유참 등과 함께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임금을 버린 반란이었나 그런데 이 반란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서경 쪽은 새 임금을 세우지 않았다. 이덕일은 이것을 인종을 황제로 받들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이덕일의 한국통사』, p.248) 개경에서 사신이 오자 서경의 장수들은 군복 차림으로 뜰에 내려와 절했다. 왕의 안부를 묻고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편지 한 통을 주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입니다." (『고려사』 권127, 묘청전) 이어 서경이 올린 표문은 더 분명하다. 폐하께서는 음양의 지극한 말을 믿고 대화궁을 지으셨으니, 천하의 황제가 머물 도읍을 만드신 것입니다. … 그런데 신하들이 임금의 마음을 본받지 않고 자기 고향 땅만 생각하여 천도를 주저하고 가로막을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 폐하께서 수레를 타고 오신다면 병기를 버리고 싸움을 멈출 것입니다. 서경이 겨눈 것은 왕이 아니었다. 왕을 붙잡고 있는 개경의 신하들이었다. 개경의 신하들은 "신하가 임금을 부르니 그 사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종은 사자에게 술과 비단을 내리고 벼슬까지 주어 돌려보냈다. 김부식은 정지상부터 죽였다 김부식은 서경에서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기 전, 재상들에게 말했다. "서경의 반역은 정지상·김안·백수한이 함께 꾸민 것이다. 이들을 없애지 않으면 서경을 평정할 수 없다." 그리고 세 사람을 궁문 밖으로 끌어내 목을 벤 뒤에 왕에게 알렸다. (『고려사』 권98, 김부식전) 『고려사』는 당시 사람들의 말도 함께 적어 두었다. 김부식은 평소 정지상과 문장으로 이름을 다투었는데, 쌓인 불만 때문에 이때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고려사』 권127, 묘청전) 신채호는 이렇게 썼다. 묘청이 왕명 없이 국호를 고치자 정지상은 왕 곁에서 묘청을 반대했다고 했다. (『조선상고사』 ...

⑦ 묘청은 왜 반란을 일으켰나? (상편)

지난 글 「 ⑥ 고려의 서경은 어디였나? 」에서 나는 고려의 서경이 지금의 요양이었다고 썼다. 이번 글은 그 서경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1135년 정월, 서경의 승려 묘청이 군사를 일으켰다. 서경에 와 있던 개경 관원들을 붙잡아 소금 창고에 가두었다. 개경 사람이라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가두었다. 군사를 보내 개경으로 가는 고갯길을 끊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했다. 하늘이 열렸다는 뜻이다. 군대는 '하늘이 보낸 충의군',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불렀다. 신채호는 이 사건을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불렀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을 '묘청의 난'이라는 이름으로만 기억한다. 교과서에는 몇 줄 나올 뿐이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갖고 있었다. 묘청은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개경 쪽과 무엇이 어떻게 달랐나? 묘청은 왜 반란까지 일으켜야 했나? 반란이 끝난 뒤 고려는 어떻게 바뀌었나? 이 질문을 가지고 나는 답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부모의 나라에서 신하의 나라로 묘청을 이해하려면 먼저 1126년 봄의 개경을 봐야 한다. 여진은 오랫동안 고려를 섬기던 사람들이었다. 신채호는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에 "여진은 고려를 종이 주인 섬기듯 했다(女眞奴事高麗)"는 말이 있고, 『고려사』에 실린 여진의 국서에도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긴다"는 말이 있다고 적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총론, 번역본 p.71) 그 여진이 1115년 금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고려와의 관계를 두 번 뒤집었다. 첫 번째는 1117년이다. 금나라 임금 아골타가 고려에 글을 보냈다. 형인 대여진 금국 황제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우리 조상 때부터 한쪽에 끼어 있으면서 거란을 큰 나라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겨 조심스럽게 섬겼다. … 왕께서 화친을 허락하여 형제가 되어, 대대로 끝없는 우호를 이루기 바란다. (兄大女眞金國皇帝 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