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

나는 지난 글 '① 고인돌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에서 고인돌과 소로리 볍씨, 환단고기, 그리고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한자리에 놓고 이야기했다. 그중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한 문단으로 스쳐 지나가기엔 너무 중요한 주제라서, 오늘은 이 주제 하나만 붙잡고 좀 더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태조가 하늘을 다시 새긴 사연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태조 4년(1395)에 돌에 새겨졌다. 별과 은하수, 그리고 하늘의 경계를 통째로 새긴 이 천문도는 지금 국보 228호로 지정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이 천문도의 아래쪽에는 제작을 주관한 권근이 쓴 그 제작 경위를 밝힌 글이 함께 새겨져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발문
천상열차분야지도 발문

이 천문도 원본은 본디 평양성에 있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강에 가라앉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오래 흘러 그 인본(印本)조차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우리 전하(태조)께서 천명을 받으신 초기에, 한 본을 바쳐 올리는 자가 있었다. 전하께서 이를 보배롭게 여기시어 서운관에 명해 돌에 다시 새기게 하셨다. 서운관에서 아뢰기를, "이 그림은 세월이 오래되어 별자리 위치가 이미 어긋났으니, 마땅히 다시 계산하여 지금 시점의 별자리를 정해야 합니다" 하니, 전하께서 옳다 하셨다. 을해년(1395년) 여름 6월에 새로 고쳐 만들었다. (위 사진을 해독한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발문 중에서...)

돌만 잃어버린 게 아니라, 그 인본조차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런데 하필 조선이 세워진 바로 그 초기에, 누군가 한 인본을 들고 나타났다. 태조는 이걸 반가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늘의 뜻을 받든 나라라는 것을 보여줄 증거가, 마침 새 나라가 시작되는 순간에 제 발로 찾아온 셈이니까.

이렇게 다시 새겨진 돌은, 그러나 순탄하게 전해지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며 존재조차 잊혔고,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창경궁 명정전 뒤 추녀 밑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그마저도 방치된 채로 — 고궁에 소풍 나온 사람들이 그 위에 앉아 도시락을 먹고, 아이들은 모래를 뿌리며 놀이판으로 삼았다고 한다. 국보가 되기 전, 이 돌은 그렇게 잊힌 채로 한 세월을 보냈다.

하나의 돌에 새겨진 두 개의 하늘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1467개의 별과 은하수, 주극원, 적도, 황도, 그리고 28수의 구역이 새겨져 있다. 별 하나하나의 크기는 실제 밝기에 비례하게, 중심에서 별까지의 거리는 북극에서 그 별까지의 실제 각거리에 비례하게 새겼다.

내가 이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책,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의 저자인 천문학자 박창범 교수는 이 천문도의 별자리 위치를 컴퓨터로 역산했다. 그 결과 천문도 중심부(주극원 안쪽)의 별자리는 조선 초의 하늘과, 바깥쪽의 별자리는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인 서기 1세기경 고구려 시대의 하늘과 맞아떨어졌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지구 자전축이 약 26,000년을 주기로 팽이처럼 조금씩 도는 세차운동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별자리 자체는 그대로여도, 북극을 중심으로 한 기준점의 위치가 조금씩 옮겨간다. 그래서 천문도를 오래 쓰다 보면 특정 절기에 남중하는 별(중성)이 달라지고, 그때마다 다시 계산해 고쳐 새겨야 했다. 앞서 인용한 발문에서 "별자리 위치가 이미 어긋났으니 다시 계산해야 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 현상을 가리킨다.

다만 이 연대 추정과 해석은 아직 역사학계 전체가 합의한 정설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 둔다. 천문학적 계산에 근거한 박창범 교수 개인의 연구 성과이며, 앞으로 더 많은 검증과 후속 연구가 필요한 분야다.

그럼에도 나는 개인적으로 박창범 교수의 이 주장에 마음이 기운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다루는 국내 주류 학계의 설명 중에는, 솔직히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과 아직 열려 있는 것을 구분하는 태도는 지키되, 그 판단 안에서 나는 박창범 교수의  주장에 조금 더 믿음이 간다는 것을 솔직히 밝혀 둔다.

허공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고구려가 정말 서기 1세기에 저렇게 정교한 별자리 지도를 만들 능력이 있었을까"라는 물음이다. 나는 이 물음에, 지난 글에서 다룬 고인돌로 돌아가서 답하고 싶다.

한반도의 고인돌에는 청동기 시대, 대략 기원전 1000년대부터 이미 별자리가 새겨지고 있었다. 지난 글 '① 고인돌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에서 소개한, 별자리인 성혈을 품고 한반도 도처에서 발견되는 고인돌들은 별에 대한 우리 민족의 관심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관심은 고인돌에 새겨진 성혈에서 그치지 않고 글로도 이어졌다. 삼국사기에는 삼국시대 전체에 걸쳐 방대한 천문 기록이 남아 있다. 백제 60여 건, 고구려 70여 건, 신라 180여 건에 이른다고 한다. 심지어 신라 거서간 4년의 일식 기록은, 오늘날 컴퓨터로 계산해 보니 실제로 기원전 53년에 일어난 일식과 정확히 들어맞았다. 지난번 소개해드린 대로,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 전체를 놓고 보면 실현율이 80%, 서기 200년 이전 기록만 놓고 보면 89%에 이른다고 한다.

이건 무엇을 뜻하는가. 삼국시대 사람들은 실제로 하늘을 정밀하게 관측하고, 그 기록을 문자로 남기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고려시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까지 문헌으로 전해졌다. 김부식이 아무리 사대주의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해도, 이렇게 정확한 천문 기록을 처음부터 지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분명 더 오래된 책을 보고 옮겨 적었을 것이다. 즉 고려 때까지는, 삼국시대의 천문 지식이 담긴 옛 문헌들이 실제로 전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평양에 있던 고구려의 원본 천문도가, 비록 원본은 잃어버렸어도 그 인본 한 장이 고려를 거쳐 조선 초까지 전해졌다는 박창범 교수의 주장도,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다.

고인돌에서 시작해 삼국사기로 이어지는 이 오랜 관측과 기록의 전통 위에서 보면,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허공에서 불쑥 나타난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기원전 1000년대부터 켜켜이 쌓여 온 관측의 결과물이, 마침 새 나라가 시작되던 순간 다시 살아난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또 다른 광개토대왕비

지난 글에서 나는 고대의 천문지식이 아무나 손댈 수 없는 신성한 분야였다고 썼다. 그런 지식을 옛사람들은 굳이 돌에 새겨 후대에 남겼다. 전쟁으로 나라가 무너지고 역사책이 사라져도, 돌에 새긴 하늘만은 살아남아 인본으로, 그리고 다시 돌로 전해졌다. 심지어 그 돌조차 한때는 궁궐 처마 밑에서 잊힌 채 놀이판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발견되어 지금 우리 앞에 있다.

고구려의 역사책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광개토대왕비가 남아 고구려의 역사를 웅변하듯, 천상열차분야지도 역시 사라진 고구려의 하늘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지 모른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③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어디인가?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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