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고대의 요수는 어디였나? (하)

1,400년 전의 날짜를 따라가다

나는 「⑦ 고대의 요하는 어디였나? (상)」에서 고대의 요하가 지금의 난하였고, 612년의 요동성은 창려였다고 썼다. 근거는 『후한서』의 기록과 갈석산과 노룡현이었다. 이번에는 612년 수 양제의 대군을 역사에 적힌 날짜와 함께 따라가 보자.

옛 역사책은 날짜를 '며칠'이 아니라 간지로 적었다. 10간과 12지를 짝지어 갑자, 을축, 병인… 하는 60개의 이름을 하루에 하나씩 돌려 붙였다. 『자치통감』은 612년 수나라의 원정을 이 간지로 적었다. 그 간지를 음력 날짜로 바꾸어 보면, 1,400년 전 전쟁의 흐름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글에서는 그 날짜를 따라 탁군에서 살수까지 가 보려 한다.
살수의 자리는 「⑥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하)」에서 살펴보았으니, 여기서는 날짜와 길에 중점을 둔다.

탁군을 떠난 113만 대군 — 정월 2일·3일

정월 임오(음력 정월 2일), 수 양제는 고구려를 치라는 조서를 내렸다. 군사는 탁군에 모였다. 탁군은 지금의 북경 남쪽 탁주 일대다.

무릇 113만 3천 8백 명이니 200만 명이라 일컬으며, 군량과 군수품을 맡은 이는 그 배나 되었다.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다음 날인 정월 계미(음력 정월 3일)에 제1군이 떠났다. (『자치통감』 권181) 하루에 한 군씩, 40리 간격으로 출발했다. 마지막 군이 떠나기까지 40일이 걸렸다. 깃발은 960리에 뻗쳤고, 황제의 군대는 그 뒤로 다시 80리에 뻗쳤다. 『삼국사기』는 "이와 같이 성대한 출진은 없었다"고 적었다.

요수를 건너고 요동성을 에워싸다 — 3월 14일~6월 11일

3월 계사(음력 3월 14일), 양제가 요수에 이르렀다.
요수가 난하라면, 탁군에서 직선으로 약 280km다.

여기서 날짜를 잘 읽어야 한다.
정월 3일은 양제가 아니라 제1군이 떠난 날이다. 24군은 하루에 한 군씩 떠나, 마지막 군이 떠나기까지 40일이 걸렸다. (『삼국사기』 영양왕 23년)
양제의 친위군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니 양제가 탁군을 떠난 것은 빨라도 2월 중순 무렵이다. 양제가 떠난 날짜를 적은 기록은 찾지 못했다. 40일의 출발 순서로 미루어 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양제가 탁군을 떠나 요수에 닿기까지는 한 달 안팎이다.
280km를 30일에 가면 하루 약 9km다. 280km는 직선거리니, 실제로 걸은 길은 더 길었을 것이다. 하루 10km 남짓을 걸은 셈이다.

옛 군대는 하루 30리, 곧 '한 사(舍)'를 기준으로 걸었다. (「⑥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하)」) 하루 10km 남짓은 이 기준과 비슷한 속도다. 한겨울이었고, 군량과 짐을 실은 대군이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고구려 군사는 난하를 사이에 두고 막아 지켰다.
양제는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세 갈래의 부교를 만들게 했다. 그런데 다리가 짧아 동쪽 강 언덕에 한 장 남짓 미치지 못했다. 물로 뛰어든 수나라 군사들을 고구려 군사가 높은 곳에서 내려쳤다. 맥철장과 전사웅, 맹차가 이때 죽었다.

이틀 뒤 다리를 다시 잇고 건너온 수나라 군사는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웠다. 고구려 군사 만여 명이 죽었다. 수나라 군사는 그 기세로 요동성을 에워쌌다. 『삼국사기』는 이 요동성이 "곧 한나라 때의 양평성"이라고 적었다. (상)에서 본 대로, 당나라 이현은 『후한서』 주석에서 양평의 옛 성이 노룡현 서남쪽에 있다고 했다. 요동성을 난하 동쪽의 창려 일대로 보는 까닭이다.

요동성은 떨어지지 않았다. 성이 함락될 듯하면 성 안에서 항복하겠다고 했고, 수나라 장수들은 양제의 허락을 기다리느라 멈췄다. 회보가 오면 성은 다시 방어를 갖추고 있었다. 이 일이 두세 번 되풀이되었다.

6월 기미(음력 6월 11일), 양제는 요동성 남쪽으로 가서 성을 살피고 장수들을 꾸짖었다. 그리고 성 서쪽 몇 리 되는 곳의 육합성에 머물렀다. 요수를 건넌 지 석 달이 지났지만, 수나라의 본군은 한 성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내호아의 수군과 9군의 별동대

요동성이 버티는 동안, 수나라는 두 갈래로 평양성을 노렸다.

하나는 바닷길이다. 좌익위대장군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을 이끌고 동래에서 바다를 건넜다. 수군은 패수로 들어와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고구려 군사를 한 번 이긴 내호아는 정병 수만 명을 이끌고 성 아래까지 나아갔다. 그런데 외성 안의 절에 군사를 숨겨 두었던 고구려가 약탈하느라 대오가 흩어진 수나라 군사를 쳤다. 살아 돌아간 자는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내호아는 바다 어귀(해구)로 물러나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다른 하나는 육로의 별동대다. 우문술은 부여도,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섰다. 형원항은 요동도, 설세웅은 옥저도, 신세웅은 현도도, 장근은 양평도, 조효재는 갈석도, 최홍승은 수성도, 위문승은 증지도로 나섰다. 이 9군 30만 5천 명이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같은 곳)

9군은 노하와 회원 두 진에서 출발할 때 사람마다 100일 치 군량을 받았다. 무기와 옷, 천막까지 더하면 한 사람이 진 짐이 3석이 넘었다. 견디지 못한 군사들은 천막 아래에 몰래 군량을 묻었다. 압록수에 이르기도 전에 군량이 떨어져 갔다. (같은 곳)

이때 을지문덕이 거짓으로 항복하러 수나라 진영에 들어가 그 형편을 살피고 돌아왔다. 그 뒤의 일은 「⑤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상)」에서 자세히 썼다. 을지문덕은 싸우다 물러나기를 되풀이하며 우문술의 군대를 살수 건너 평양성 30리 앞까지 끌어들였다.

살수의 패전과 퇴각 — 7월 24일·25일, 기록의 빈틈

7월 임인(음력 7월 24일), 수나라 군대가 살수에서 크게 패했다. (『자치통감』 권181) 군사들이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 군사가 뒤에서 쳤다.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이때 죽었다. 남은 군사는 하루 낮 하룻밤에 450리를 달아나 압록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삼국사기』 영양왕 23년) 이 450리가 부풀려진 숫자라는 점은 「⑥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하)」에서 살폈다.

그다음 날짜가 문제다. 7월 계묘(음력 7월 25일), 양제가 군사를 돌렸다고 한다. (『자치통감』 권181) 살수에서 패한 바로 다음 날이다. 기록에 양제의 자리가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은 6월, 요동성 서쪽 몇 리 떨어진 육합성이다. 요동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양제는 요동성 곁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패전 소식이 하루 만에 그곳에 닿고, 양제가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일정은 어느 가정을 따르더라도 맞지 않는다. 살수에서 요동성까지는 하루에 닿을 거리가 아니다. 450리를 하루 낮밤에 달아났다는 기록처럼, 이 날짜도 여러 날의 일을 한데 묶어 적었거나 잘못 적은 것으로 본다.

결과는 분명하다. 9군 가운데 요동성으로 돌아간 자는 2,700명뿐이었다. (『삼국사기』 영양왕 23년)

양제가 이 원정에서 얻은 것은 요수 서쪽에 있던 고구려의 국경 초소 무려라(武厲邏) 한 곳이었다. '라(邏)'는 순라를 도는 곳이라는 뜻이다. 고구려는 요수 너머에도 이런 거점을 두고 있었다. 수나라는 그곳에 요동군과 통정진을 두었다. (『삼국사기』 영양왕 23년)

신채호 선생은 중국 사서가 이 패전을 줄이고 감추었다고 보았다. 중국의 수치는 숨기고 중국의 영광은 드러내는 춘추필법이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한눈에 보는 일정표

지금까지의 일정을 지도와 표로 정리했다. 지도는 요수를 난하, 요동성을 창려, 압록수를 지금의 요하, 살수를 혼하, 평양성을 요양으로 본 이 연재의 비정을 따랐다. 본군은 요수(난하)를 건너 요동성(창려)을 에워쌌고, 별동대는 압록수(지금의 요하)를 건너 살수(혼하)를 지나 평양성(요양)으로 향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난하, 요하, 혼하, 요양의 순서다. 기록의 강 순서와 어긋나는 곳이 없다.

612년 수나라 군대의 침입과 퇴각 경로
612년 수나라 군대의 침입과 퇴각 경로


기록의 날짜음력일어난 일
정월 임오정월 2일양제가 탁군에서 조서를 내리다
정월 계미정월 3일제1군이 탁군을 떠나다 (40일 동안 차례로 출발)
3월 계사3월 14일양제가 요수에 이르다 (『삼국사기』는 2월)
3월—부교가 짧아 실패, 이틀 뒤 다시 건너 요동성을 에워싸다
6월 기미6월 11일양제가 요동성 남쪽을 살피고 육합성에 머물다
(날짜 없음)—내호아 수군이 평양 외성에서 패하다 / 9군이 압록수 서쪽에 모이다
7월 임인7월 24일살수에서 대패하다
7월 계묘7월 25일양제가 군사를 돌리다 (기록상 날짜, 하루 만의 퇴각은 불가능)

출전의 날짜는 『자치통감』 권181을, 사건의 내용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을 따랐다. 간지를 음력 날짜로 바꾼 것은 오늘날의 천문 계산으로 만든 음력을 따른 것이다. 당시 수나라가 쓴 역법과는 하루쯤 어긋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날짜를 따라가 보니 612년의 원정은 두 일정이 보인다.

하나는 이치에 맞는 일정이다. 양제의 군대는 탁군에서 요수까지 한 달 안팎, 하루 10km 남짓을 걸었고, 요동성 앞에서 석 달을 보냈다. 요수를 난하로, 요동성을 창려 일대로 놓아도 이 일정은 어긋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루 낮 하루 밤의 450리, 패전 다음 날의 퇴각. 이 두 기록은 어느 비정을 따르더라도 설명되지 않는다. 기록을 남긴 쪽이 패전의 과정을 서둘러 줄인 흔적으로 생각한다.

113만 대군을 이끌고 온 양제는 별동대 30만 5천명을 거의 다 잃고, 국경 초소 하나를 얻어 돌아갔다. 수나라는 이듬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다시 요수를 건너왔다. 그리고 결국 수나라는 무너졌다.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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