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였는가? (상편) — 진개는 고조선을 평양으로 밀어냈는가
나는 학창 시절에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어디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고조선의 수도가 어디인지는 묻지 않았다. 질문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만큼 고조선은 나에게 역사가 아니라 신화였다.
지금은 다르다. 나는 지난 글들에서 이 땅의 고인돌과 청동검을 살펴보았고, 단군의 기록과 요서의 유물을 맞추어 보았다. 갑골문 속의 방(方)과 제(帝)도 찾아보았다. 나는 이제 고조선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라고 확신한다. 역사라면 수도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였는가?
한 편의 방송에서 시작된 질문
이 질문이 시작된 것은 우연히 본 방송 한 편 때문이다. KBS 「HD역사스페셜 – 첫 나라 고조선, 수도는 어디였나」(2005년 5월 27일 방송)다. 유튜브에서 130만 명 넘게 본 영상이다.
👉 KBS HD역사스페셜 「첫 나라 고조선, 수도는 어디였나」
방송의 줄거리는 이렇다.
고조선을 대표하는 유물인 비파형동검은 현재 북한의 평양보다 요서와 요동, 만주에서 더 많이 나온다. 가장 크고 정교한 탁자식 고인돌도 평양이 아니라 요동반도의 개주와 해성 일대에 있다. 중국 사서의 주석은 요동의 험독현이 조선 왕의 옛 도읍이라고 적었다. 방송은 이 험독을 요하 하구, 지금의 개주·해성 일대로 보았다.
여기까지는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조선의 첫 수도는 아사달이라고 많은 한국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 아사달이 지금의 어디인지를 두고는 하얼빈설, 요동설, 평양설 등 여러 설이 있다. 나는 「③ 배달국과 단군을 다시 읽다 (상)」과 「④ 배달국과 단군을 다시 읽다 (하)」에서 단군의 첫 도읍을 요서의 조양 일대로 보았다. 그리고 고조선 중기 이후의 중심은 요양 일대였다고 썼다. 방송이 말한 개주·해성 일대도 요양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이 글은 그 뒤의 이야기다. 지금 내가 주목한 것은 방송의 그 다음 대목이다.
방송이 말하는 '평양 천도'
방송은 이렇게 이어진다. 고조선은 요동에 수도를 두고 요서까지 아우르는 큰 나라였다. 그런데 연나라를 치려다 도리어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공격을 받아 서쪽 땅 2천여 리를 잃었다. 그 타격으로 고조선은 현재 북한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 뒤 200여 년 동안 후기 고조선의 역사가 평양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이것이 지금 우리 학계가 가장 많이 받아들이는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이다. 처음에는 요동에 있다가, 진개에게 땅을 빼앗기고 지금의 평양으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나는 물었다. 진개가 2천 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은 있다. 그렇다면 고조선이 현재 북한의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기록도 있는가?
진개는 무엇을 빼앗았나
진개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 전국시대 연나라의 장수다. 기원전 300년 무렵의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는 그보다 200년쯤 뒤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와, 다시 300년쯤 뒤 위나라 어환의 『위략』에 남아 있다.
진개는 중국의 정사에 딱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이다.
"그 뒤 연나라에 어진 장수 진개가 있었는데, 오랑캐(동호)에게 인질로 가 있으면서 크게 믿음을 얻었다. 돌아와서는 동호를 습격해 깨뜨리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 연나라도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까지 이르렀다.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두어 오랑캐를 막았다."
두 번째는 『삼국지』 「동이전」 한(韓)조에 붙은 『위략』의 인용문이다.
"뒤에 (조선 왕의)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천여 리를 빼앗고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다. 조선은 마침내 약해졌다."
두 기록을 함께 읽으면 이렇다. 『사기』는 상대를 '동호'라 했고 『위략』은 '조선'이라 했다. 『사기』는 천여 리라 했고 『위략』은 2천여 리라 했다. 이덕일 역사학자는 두 기록이 같은 사건을 적은 것이라고 본다. 신채호 선생도 『조선상고사』에서 이 동호를 고조선의 일부로 보았다.
천여 리와 2천여 리는 자로 잰 거리가 아니다. 같은 일을 두고 기록마다 숫자가 다르다. 나는 넓은 땅을 잃었다는 뜻으로 읽는다. 나는 「⑤ 갑골문에 나오는 방은 어느 나라인가?」에서 상나라 때 고조선이 베이징과 하북 일대에서 상나라와 맞섰다고 썼다. 진개의 침입은 고조선이 그 서쪽 땅을 잃은 일이다.
그런데 두 기록 어디에도 없는 말이 있다.
'천도'다.
『위략』은 땅을 빼앗기고 "조선은 마침내 약해졌다"고만 적었다. 수도를 옮겼다는 말은 한 글자도 없다. 『사기』도 마찬가지다. 진개 이후의 조선을 이어서 적은 『위략』의 다음 대목을 보아도 그렇다.
"진나라가 천하를 아우르자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 왕 '부'가 즉위하였다. … '부'가 죽고 그 아들 준이 즉위하였다. … 한나라가 노관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
여기서 노관이 왕이 된 연나라는 진개의 연나라가 아니다. 진나라에 망한 연나라 자리에 한나라가 다시 세운 제후국이다.
진나라의 장성은 요동에 이르렀다. 조선과 연의 경계는 패수였다. 어디에도 조선이 남쪽 멀리 대동강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은 없다.
그렇다면 평양 천도는 어디서 나왔나
결론부터 말하면, 고조선이 진개에게 밀려 지금 북한의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은 어느 역사책에도 없다. 그것은 기록이 아니라 추론이다.
그 추론은 두 가지에 기대고 있다.
첫째는 유물이다. 요서·요동의 비파형동검 문화가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줄어들고, 지금 북한의 평양 일대에서 세형동검이 늘어난다. 이 변화를 수도가 옮겨 간 흔적으로 읽은 것이다.
둘째는 중국 사서에 달린 주석 한 줄이다. 『사기』 「조선열전」은 위만이 "왕험에 도읍하였다"고 적었다. 이 왕험성에 대해 후대 학자들이 붙인 주석은 이렇다.
"응소는 '『지리지』의 요동군 험독현이 조선 왕의 옛 도읍'이라고 하였다. … 신찬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응소는 조선 왕의 옛 도읍을 요동의 험독이라 했다. 신찬은 왕험성을 낙랑군 패수의 동쪽이라 했다. 이동설은 두 말을 이렇게 잇는다. 옛 도읍 험독은 요동에 있었고, 위만이 도읍한 왕험성은 낙랑, 곧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 그러니 그 사이에 도읍이 옮겨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낙랑군은 지금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는 전제가 맞아야만 성립한다.
신찬은 왕험성이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했을 뿐, 그곳이 대동강이라고 하지 않았다. 낙랑군과 패수가 어디였는지가 먼저 밝혀져야 한다. 이것은 하편에서 따져 보려 한다.
상편을 마치며
정리하면 이렇다.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땅 2천여 리를 빼앗은 것은 기록에 있다. 그 뒤 고조선이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은 없다. 기록이 말하는 것은 "조선은 마침내 약해졌다"는 것, 그리고 그 뒤 조선과 연의 경계가 패수였다는 것뿐이다.
평양 천도설은 유물의 변화와 주석 한 줄을 '낙랑은 지금 북한의 평양'이라는 전제 위에서 이어 붙인 해석이다. 그 전제가 흔들리면 '평양 천도설'도 함께 흔들린다.
그렇다면 진개 이후 고조선의 국경은 어디였고, 중심은 어디였을까?
👉 다음 글 바로가기 ⑧ 고조선의 수도는 어디였는가? (하편) — 고조선 중기 이후의 수도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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