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고대의 요수는 어디였나? (상)
고대의 요수는 '먼 곳에 있는 강'이었다
나는 앞의 글들에서 고구려의 평양이 지금의 요양이고, 고구려의 압록이 지금의 요하라고 썼다. 그리고 을지문덕의 살수를 지금의 혼하로 보았다.
그런데 하나의 물음이 남아 있다. 612년 수나라 군사는 먼저 요수를 건너 요동성을 에워쌌다. 그리고 별동대가 다시 압록수를 건넌다. 요수와 압록수는 서로 다른 강이었다. 고구려의 압록이 지금의 요하라면, 고구려의 요수는 어느 강이었는가.
사실 '요(遼)'는 '멀다'는 뜻이다. 요수는 중국의 입장에서 글자 그대로 '먼 곳에 있는 강'이었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이덕일·김병기, p.124)
수나라와 당나라의 도읍은 장안, 지금의 서안이다. 장안은 북경에서 서남쪽으로 직선 약 900km 떨어져 있다. 난하는 북경보다도 더 동쪽에 있다. 장안의 사람들에게 난하는 먼 곳에 있는 강이었고, 북동쪽 국경을 이루는 강이었다.
나는 지난 글 「⑤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상)」에서 요동성의 자리를 두고 두 가지 설을 소개했다. 하나는 난하 동쪽의 창려이고, 다른 하나는 대릉하와 요하 사이다. 그리고 어느 설이 맞는지는 다른 글에서 따로 살펴보겠다고 했다. 이번 글이 그 글이다.
'요하'라는 이름은 요나라 때 처음 나온다
지금의 요하는 언제부터 '요하'라 불렸을까. 거란의 정사 『요사』 「지리지」는 동경 요양부를 설명하며 이렇게 적었다.
遼河出東北山口爲範河 西南流爲大口 入於海
(요하는 동북쪽 산어귀에서 나와 범하가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대구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渾河在東梁、範河之間
(혼하는 동량하와 범하 사이에 있다.)
(『요사』 권38, 「지리지」 동경도 동경요양부 — 위키문헌 원문)
여기서 처음으로 '요하(遼河)'와 '혼하(渾河)'라는 이름이 나란히 나온다.
중국에서 나온 글도 "요하와 혼하라는 이름은 모두 요나라 때 처음 보인다(辽河、浑河之称均始见于辽代)"고 적었다. (「“辽水”、“辽海”地名考」)
난하라는 이름도 다르지 않다. 박시현·복기대 교수는 당나라 말 거란의 아보기가 새 성을 쌓아 난주를 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날 난하라는 이름도 이때 처음 생긴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박시현·복기대, p.213)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 우리가 쓰는 난하·요하·혼하라는 이름은 모두 거란이 이 땅을 차지한 뒤에 기록에 나타난다. 그보다 앞선 고구려와 수·당의 기록을 읽을 때, 지금의 강 이름을 그대로 겹쳐 읽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이것은 지난 글의 결론과도 이어진다.
나는 「⑥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하)」에서 "혼하를 '살수'라고 직접 적은 옛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썼다. 혼하라는 이름 자체가 요나라 때 처음 나오니, 612년의 기록에 혼하가 나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고대의 요수는 난하다
위 글에서 요수와 요하가 다른 강인 것을 알았다. 그럼 고대의 요수는 어디인가?
먼저 고조선과 한나라 때의 요수부터 보자. 이때의 요수는 지금의 난하였다. 난하는 하북성 북쪽에서 내려와 진황도와 당산 사이에서 발해로 들어가는 강이다. 지금의 요하에서 서쪽으로 200km가 넘게 떨어져 있다.
가장 이른 기록은 고조선 때의 일이다. 「번한세가」는 번한의 첫 왕 치두남이 요수 주위에 12성을 쌓았다고 적었다.
경자(BCE 2301)년에, 요수 주위에 12성을 쌓으니 …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p.462~463)
역주본은 이 요수에 "지금의 하북성 난하를 말한다"는 주석을 달았다.
고구려 초기의 기록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고구려국본기」는 태조무열제가 요서에 10성을 쌓았다고 적었다. 『삼국사기』도 태조왕 3년(55)에 요서 10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에 대비했다고 적었다. 『환단고기』는 그 10성 가운데 요동성이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다"고 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p.609)
역주본은 요수의 자리를 두 곳에서 풀었다. 하나는 갈석산에 붙인 주석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 갈석산이고, 장성에 의해 잘리는 물이 요수, 즉 오늘날의 난하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주석 19) 「갈석산」, p.628)
다른 하나는 요동성에 붙인 주석이다.
요수는 시대에 따라 백하·난하·대릉하 등으로 바뀌어 국경 하천을 대표해 왔다. 그 후 요(916~1125)나라 건국 후에 비로소 대요하로 고정되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고구려 당시 요수는 곧 지금의 난하로 요동성은 요수(난하) 동쪽인 지금의 창려에 있었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주석 23) 「요동성」, p.628~629)
이 주석에서 내가 무게를 두는 것은 앞부분이다. 요수는 한 강의 이름으로 굳어 있지 않았다. 시대에 따라 국경을 이루는 강을 가리켰다.
역주본의 주석만이 아니다. 중국의 옛 기록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갈석산과 노룡현이 가리키는 곳
고조선과 한나라 때의 요수가 난하였다는 근거는 갈석산과 노룡현에 있다.
두 곳 모두 난하 하류의 동쪽에 있다. 갈석산은 지금의 창려에, 노룡현은 그 바로 북쪽에 있다.
먼저 갈석산이다. 동한 말기의 학자 고유는 『회남자』에 주석을 달며 이렇게 썼다.
요수는 갈석산에서 나와 새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곧게 요동의 서남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회남자』 고유 주 —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이덕일·김병기, p.135·272 재인용)
고유는 서기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의 사람이다. 갈석산 근처를 흐르는 큰 강은 난하뿐이다. 요수가 난하였다는 인식은 적어도 그때까지 이어졌다. 『환단고기』 역주본도 『통전』을 들어, 장성이 갈석산에서 시작하고 그 장성에 잘리는 물이 요수, 곧 난하라고 했다. (고구려국본기 주석 19), p.628)
다음은 노룡현이다. 『설원』 「변물」은 제나라 환공과 관중이 고죽국을 치러 갈 때 요수를 건넌다고 적었다. 고죽국은 지금의 노룡현 일대다. 노룡현은 난하 하류의 동쪽에 있으니, 이 요수는 난하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p.124~125)
옛 기록은 이 노룡현에 요동도 놓는다.
당나라의 이현(李賢)은 7세기 후반에 『후한서』에 주석을 달며, 요동군의 중심 현인 양평을 이렇게 적었다.
양평은 현으로 요동군에 속했다. 그 옛 성은 지금의 평주 노룡현 서남쪽에 있다. (襄平縣屬遼東郡 故城在今平州盧龍縣西南)
(『후한서』 권74 하, 「원소·유표 열전」 이현 주 — 『환단고기』 북부여기 주석 7), p.277 재인용)
여기서 '지금'은 이현이 살던 당나라 때다. 요동은 '요수의 동쪽'이다. 요동의 중심이 노룡 일대였다면, 그 서쪽의 요수는 난하밖에 없다. 2~3세기의 고유에서 7세기의 이현까지, 요수가 난하라는 인식은 이어졌다.
612년의 요수도 난하다
그렇다면 612년 수 양제가 건넌 요수는 어느 강이었을까. 나는 이때의 요수도 난하였다고 본다. 『삼국사기』에 그 단서가 되는 기록이 있다.
9년에 왕이 말갈의 무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공했는데, 영주총관 위충이 쳐서 물리쳤다.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9년(598))
598년에 수나라는 영주에 총관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 영양왕이 수나라를 선제공격한 곳은 '요서'에 있던 영주총관이었다. 영주는 요서, 곧 요수의 서쪽에 있었던 것이다.
영주가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지금 확정할 수 없다. 통설은 지금의 요령성 조양으로 본다.
그러나 『요사』 「지리지」는 영주를 "본래 상나라 고죽국이며, 진나라 때 요서군에 속했고, 한나라 때 창려군이었다"고 적었다. (『요사』 권40) 허항종도 영주를 "한·당의 요서 땅"이라 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박시현·복기대, p.201) 이름은 옮겨 다녀도, 여러 기록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다. 영주는 요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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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요수는 난하다 |
수나라 대군은 정월 계미(음력 정월 3일)에 탁군(지금의 북경 남쪽 탁주)을 떠났다. 양제는 3월 계사(음력 3월 14일)에 요수에 이르렀다. (『자치통감』 권181) 수나라 군사는 부교를 놓고 요수를 건너 동쪽 언덕에서 고구려 군사와 크게 싸웠다. 『삼국사기』는 그 다음을 이렇게 적었다.
수의 여러 군단은 승세를 타고 진격해 요동성을 에워싸니, 이곳은 곧 한나라 때의 양평성이다.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날짜는 『자치통감』의 간지를 오늘날의 천문 계산으로 만든 음력에 맞춘 것이다.
수나라 달력과 하루쯤 다를 수 있다.
기록은 요수를 건넌 뒤 요동성에 이르기까지 다른 성이나 싸움을 적지 않았다. 요수를 건넌 수나라 본군이 처음 에워싼 성이 요동성이었다. 요동성은 '요수의 동쪽'이라는 이름 그대로 요수 동쪽에 있었다. 그렇다면 요동성이 어디냐는 물음은 요수가 어느 강이냐는 물음에 달려 있다.
「⑤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상)」에서 요동성의 자리를 두고 두 설을 소개했다. 하나는 『환단고기』 주석의 창려설이다. 다른 하나는 요수를 대릉하로 보고 요동성을 대릉하와 요하 사이에서 찾는 설이다. 두 설 모두 요동성을 난하의 동쪽에 둔다. 둘이 갈리는 곳은 요수다.
요수를 가르는 근거는 앞에서 본 갈석산과 노룡현이다. 요수는 갈석산과 노룡현 앞을 흘렀다. 그 강은 난하다. 요수가 난하라면, 요수를 대릉하로 보는 대릉하설은 출발점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요동성의 자리는 두 기록을 보면 나온다.
『삼국사기』는 요동성이 "곧 한나라 때의 양평성"이라고 했다.
『후한서』에서는 그 양평의 옛 성이 노룡현 서남쪽에 있다고 했다.
612년의 요동성은 노룡현 서남쪽, 난하의 동쪽에 있었던 것이다.
노룡과 창려 사이, 난하 동쪽 기슭이다. 『환단고기』가 요동성을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둔 것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p.609) ⑤ (상)의 두 설 가운데 창려설이 기록에 맞는다. 다만 정확히 말하면 창려가 아니라 그 서쪽, 창려 일대다.
글을 마치며
요수는 특정한 강의 이름이 아니었다. '먼 강', 곧 국경을 이루는 강의 이름이었다. 고조선에서 수나라의 침입까지, 고대의 요수는 갈석산과 노룡현 앞을 흐르는 지금의 난하였다. 요동성은 난하 동쪽의 창려 일대에, 수나라의 영주는 난하 서쪽의 요서에 있었다.
'요하'라는 이름은 거란이 요나라를 세운 뒤에야 지금의 요하에 붙었다.
그 전까지 기록에는 '요하'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요수'가 있을 뿐이다.
10세기 거란이 요나라를 세우기 전까지 고대인들은 '요수'를 경계로 국경을 인식하였다. '요수'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그 곳에 국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612년 수 양제의 113만 대군을 날짜와 함께 따라가 보려 한다.
요수를 난하로 놓았을 때 진격과 퇴각의 일정이 기록과 맞는지 살펴볼 것이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⑧ 고대의 요수는 어디였나? (하)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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