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상) — 세 나라의 기록

우리는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대첩을 3대 대첩이라 부른다.

한산도대첩의 이순신 장군은 내가 다른 블로그에서 오래 이야기해 온 분이다.
귀주대첩은 지난 글 「⑤ 귀주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에서 그 자리를 찾아보았다.
이제 하나가 남았다.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삼국사기』가 적은 살수대첩

612년 정월, 수 양제는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모았다. 『삼국사기』는 그 규모를 이렇게 적었다.

무릇 113만 3천 8백 명이니 200만 명이라 일컬었으며, 군량과 군수품을 맡은 이는 그 배나 되었다.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수군은 요수를 건너 요동성을 에워쌌다. 그러나 요동성은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바다로 온 내호아의 수군은 패수로 들어와 평양성을 넘보다가 성 안의 복병에게 크게 졌다.

여기서 요동성과 평양성은 서로 다른 성이다. 수나라 본군이 요동성을 에워싼 동안 별동대는 압록수(요하)를 건너 평양성으로 향했고, 살수에서 무너진 뒤에는 다시 요동성으로 돌아갔다. 요동성은 압록수(요하)의 서쪽에, 평양성은 그 동쪽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환단고기』 역주본의 주석처럼 요동성을 난하 동쪽의 창려로 보는 것이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주석 23), p.628~629)
다른 하나는 요수를 대릉하로 보고, 요동성을 대릉하와 요하 사이에서 찾는 것이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남주성, p.142의 요수·압록 비정에 따름)
평양성(요양)에서 창려까지는 직선으로 약 380km, 대릉하와 요하 사이까지는 약 100~120km다.
어느 설이 맞는지는 추후 다시 따져보려 한다.
지금은 살수의 위치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요동성과 평양성과 패수의 위치
요동성과 평양성과 패수의 위치

양제는 따로 별동대를 꾸렸다. 우문술과 우중문이 이끄는 9개 군 30만 5천 명이다.
이들은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병사마다 100일 치 군량과 무기를 졌다. 너무 무거워 몰래 땅에 묻는 자가 많았다. 길의 절반쯤에서 군량이 바닥을 보였다.

이때 영양왕은 을지문덕을 수의 진영에 보냈다. 거짓으로 항복하며 적의 형편을 살피게 한 것이다. 우중문은 그를 붙잡으려다 놓쳤다. 을지문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압록수를 건너 돌아왔다.

수군은 을지문덕을 뒤쫓아 압록수를 건넜다. 을지문덕은 적이 굶주린 것을 보았다. 그래서 싸울 때마다 일부러 달아났다. 우문술은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모두 이겼다. 그 기세로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넜고,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해 진을 쳤다.

을지문덕은 다시 거짓 항복을 했다. 군사를 물리면 왕을 모시고 양제에게 가서 조회하겠다고 했다. 우문술은 군사들이 지쳤고 평양성이 험해 쉽게 떨어뜨릴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 말을 핑계 삼아 군사를 돌렸다. 고구려군은 사방에서 쳤다.

가을 7월에 살수에 이르러 수의 군사들이 절반쯤 건너는 중에 우리 군사가 뒤쪽에서 그들의 후방 부대를 공격하니,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싸우다가 죽었다. 그러자 여러 부대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려 걷잡을 수 없었다. 장수와 사졸들이 뛰어 달아나서 하루 낮 하룻밤 만에 압록수까지 450리를 갔다. … 처음에 9군이 요동에 왔을 때는 무릇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오직 2천 7백 명뿐이었다.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30만 5천 명 가운데 2천 7백 명이 살아 돌아갔다. 백 명에 한 명도 되지 않는다.

『수서』가 적은 살수대첩

진 쪽은 이 싸움을 어떻게 적었을까. 수나라의 정사 『수서』는 이 전쟁을 세 곳에 적었다.
그런데 자세히 적은 곳은 한 곳뿐이다.

가장 자세한 기록은 패전의 책임을 진 장수 우문술의 열전이다. 『삼국사기』의 살수대첩 대목은 거의 이 기록을 옮긴 것이다.

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為營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해 진을 쳤다.)

一日一夜 還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 (하루 낮 하룻밤에 돌아와 압록수에 이르렀으니, 450리를 갔다.)

初 渡遼九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처음 요를 건넌 9군은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돌아왔을 때는 2천 7백 명뿐이었다.)

(『수서』 권61, 「우문술전」)

두 가지를 눈여겨 두자. 하나, '동쪽으로 살수를 건넜다'는 말은 수나라 기록에 처음부터 있다. 둘, 450리라는 숫자도 『삼국사기』가 만든 것이 아니라 진 쪽인 수나라가 적은 것이다.

고구려를 다룬 「고려전」에는 살수도, 을지문덕도, 우문술도 나오지 않는다. 30만 대군이 무너진 일을 "여러 군이 많이 패하였다(諸軍多敗績)"는 한마디로 넘겼다. (『수서』 권81, 동이열전 「고려전」) 황제의 기록인 「양제기」도 우문술 등이 패하고 이튿날 군사를 돌렸다고 날짜만 적었다.
이처럼 수서의 기록은 너무 짧고 간단하다.

『환단고기』가 적은 살수대첩, 그리고 그 뒤

『환단고기』는 같은 싸움을 이렇게 적었다.

홍무 23년(612)에 수나라 군사 130여 만 명이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왔다. 을지문덕이 출병하여 기묘한 계략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러 마침내 크게 격파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바다와 육지에서 함께 궤멸되어, 살아서 요동성으로 돌아간 자가 겨우 2천 7백 명이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p.580)

여기까지는 『삼국사기』와 같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삼국사기』가 적지 않은 그 뒤의 이야기를 이어 간다.

양광(수 양제)이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구걸하였으나 을지문덕이 듣지 않았고, 열제(영양제) 또한 추격하도록 엄한 명을 내리셨다. 을지문덕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곧바로 몰아붙여, 한 갈래는 현도 길로 태원에 이르고, 한 갈래는 낙랑 길로 유주에 이르러, 그곳의 주와 현에 들어가서 다스리고, 떠도는 백성을 불러 모아 안심하게 하였다. … 이때 강한 군사가 백만이었고 영토는 더욱 커졌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p.580)

『삼국사기』의 살수대첩은 수나라 군대가 물러가는 데서 끝난다. 『환단고기』의 살수대첩은 고구려가 그 기세를 타고 태원(지금의 산서성)과 유주(지금의 하북성 북부)까지 나아가는 데서 끝난다. 막아 낸 싸움이 아니라 되받아친 싸움이다.

살수는 어디인가

교과서는 살수를 지금 북한의 청천강이라고 가르친다. 신채호도 살수를 청천강으로 보았다. (『조선상고사』 제9편 제2장)

살수가 청천강이라는 생각은 오래되었다. 『환단고기』는 을지문덕의 공을 기린 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조준이 명나라 사신 축맹과 함께 백상루에 올라 읊은 시를 실었다.

살수 물결 세차게 흘러 푸른 빛 띠는데 / 옛적 수나라 백만 군사 고기밥이 되었구나 / 지금도 어부와 나무꾼에게 그때 이야기 남았건만 / 명나라 사신은 언짢아 한 번 웃고 마는구나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p.582~583)

백상루는 평안남도 안주의 청천강 가에 있던 누각이다. 조준이 그곳에서 살수를 읊었다면, 그때 사람들은 이미 청천강을 살수로 여겼던 것이다. 이것은 청천강설을 받쳐 주는 기록이다.

그런데 조선의 정조는 이 비정을 의심했다.

조선시대 정조가 신하에게 묻기를 지금의 청천강이 살수(薩水)였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하면서 묻는다. 그때 신하가 답하기를 참 궁색한 답변을 한다. 청천강이 옛날에는 지금보다 넓지 않았을까요? 하면서 확실히 모르겠노라는 답을 한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복기대, 「압록과 고려의 북계를 마치며」, p.305~306)

나도 같은 물음을 가지고 있다. 먼저 두 가지를 짚어 보자.

하나, '살수'라는 이름은 한 곳에만 있지 않았다

『환단고기』 역주본은 살수를 이렇게 풀었다.

일명 살하수로 '물이 살살 흐르는 강'이란 뜻이다. 고대에 살수는 네 곳이 있는데 ①개평현 주남하 ②요동반도의 대양하 ③청주 무심천 ④청천강 등이다. 이덕수는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을 거둔 곳을 대양하라 하였고 정인보는 주남하라 하였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주석 22) 「살수」, p.628)

『삼국사기』에도 612년 말고 살수가 여러 번 나온다.

  • 44년, 후한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살수 이남"을 한의 군현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
  • 56년, 고구려 태조왕이 동옥저를 쳐서 국경을 "남쪽으로는 살수까지" 넓혔다. (『삼국사기』 권15, 고구려본기 태조왕 4년)
  • 494년, 신라군이 고구려군과 "살수의 들판"에서 싸우다 져서 견아성으로 물러났다. 백제가 군사 3천을 보내 구원했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16년 / 권19,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3년)

494년의 살수는 신라군이 싸우고 백제군이 구원하러 온 곳이다. 이 살수를 청천강으로 보기는 어렵다. 신채호도 이 살수를 청천강이 아니라 "지금의 대동강 상류"라고 했다. (『조선상고사』)

살수라는 이름은 여러 강에 붙었다. 이름만으로는 612년의 살수를 정할 수 없다. 백상루의 시도 '청천강이 살수다'라는 증명이 아니라 '조준의 시대에 청천강을 살수라 불렀다'는 증언일 뿐이다.

둘, 살수의 자리는 압록수와 평양에 묶여 있다

『삼국사기』가 적은 순서를 다시 보자.

  1. 수군은 요수를 건너 요동성을 에워쌌다.
  2. 별동대는 압록수 서쪽에 모여 압록수를 건넜다.
  3.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넜고, 평양성 30리 앞에 진을 쳤다.
  4. 돌아갈 때 살수에서 무너졌고, 하루 낮 하룻밤 만에 450리를 가서 압록수에 이르렀다.

살수는 압록수와 평양 사이를 흐르는 강이다. 이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니 살수가 어디인지는 압록수와 평양이 어디인지에 달려 있다.

교과서는 압록수를 지금의 압록강으로, 평양을 지금 북한의 평양으로 본다.
그 사이에 흐르는 큰 강이 청천강이다. 그래서 살수는 청천강이 된다.

그런데 나는 앞 글 「③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어디인가?」에서 고구려의 평양이 지금의 요양이라고 썼다. 「④ 고대의 압록강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이 맞는가?」에서는 고구려의 압록이 지금의 요하라고 썼다. 그렇다면 살수는 요하와 요양 사이 어딘가를 흐르는 강이어야 한다.

다음 편에서

그렇다면 요하와 요양 사이를 흐르는 어느 강이 살수일까. 그 답을 찾으려면 먼저 기록에 남은 '하루 낮 하룻밤에 450리'라는 숫자부터 따져 보아야 한다. 다음 편에서 이어 간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⑥ 살수대첩은 어디에서 벌어졌나? (하) — 살수는 혼하다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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