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삼국사기와 통일신라 국경선에 대하여

앞 글에서 나는 『요사』, 「고려도경」, 「봉사행정록」의 세 기록을 소개하였다.
세 기록은 모두 신라와 고려의 경계가 한반도 밖에 있었다고 가리켰다. 그런데 세 기록은 모두 중국 쪽 기록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 이번에는 『삼국사기』를 펼쳐 보자.

교과서가 말하는 두 개의 국경선

교과서는 통일신라의 북쪽 국경선을 두 단계로 설명한다.

  1. 초기 국경선: 임진강~덕원. 676년 나당전쟁이 끝난 직후, 문무왕 때의 경계다. 서쪽은 임진강, 동쪽은 함경남도 덕원에 이른다.
  2. 후기 국경선: 대동강~원산만. 735년 당이 발해를 견제하려고 신라에게 패강 이남의 땅을 인정한 뒤, 성덕왕 때 정해진 경계다. 서쪽은 대동강, 동쪽은 원산만에 이른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 9권 「통일신라」도 이렇게 설명하고, 『압록과 고려의 북계』도 이를 학계의 통설로 소개한다. 나는 이 두 국경선을 모두 믿지 않는다. 내가 왜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이 두 국경선을 모두 믿지 않는지는 아래 글에서 설명하려 한다.

후기 국경선인 '대동강~원산만'의 근거는 『삼국사기』 성덕왕 34년(735) 조의 한 줄이다.

의충이 돌아올 때 황제가 조칙으로 패강 이남의 땅을 내려주었다. —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성덕왕 34년

이듬해 성덕왕은 당에 감사의 표문을 보냈다. 그 표문에도 "패강 이남의 땅을 내려주셨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대동강'이라는 말도 '원산만'이라는 말도 없다. 『삼국사기』에 있는 말은 '패강'뿐이다. 패강을 대동강으로 읽고, 그 동쪽 끝을 원산만에 이은 것은 일제시대 일본 학자들과 현재 한국의 주류 사학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그러니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패강은 어디인가?

패강은 어디인가

『압록과 고려의 북계』는 『요사』 지리지를 근거로 든다. 요나라 동경요양부 관내에 '패수'가 있었다는 기록이다. 패수는 패강의 다른 이름이다. 이 책은 고려의 서경인 평양을 지금의 요양으로 본다. 그렇다면 패수와 신라의 패강진도 요양·심양 부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같은 책은 당나라 장구령의 문집에 실린 칙서도 소개한다. 성덕왕이 패강에 군영을 두려 하자 당 현종은 이렇게 답하였다.

그곳은 발해를 대응할 수 있는 요충이고, 또 녹산과도 서로 마주 바라보고 있는 곳이므로 아주 좋은 계책이다. — 『장구령집』 「여신라왕김흥광칙」 (『압록과 고려의 북계』에서 재인용)

패강은 발해를 막는 요충이었다. 발해의 남쪽 경계가 어디였는지를 함께 따져야 패강의 자리도 바로 보인다.

호로하와 철관성, 『삼국사기』의 또 다른 지명들

『삼국사기』에는 나당전쟁 무렵의 북쪽 지명이 몇 개 더 나온다.

첫째는 호로하(瓠瀘河)다. 문무왕은 671년 설인귀에게 보낸 답서에서 662년의 일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신라군이 평양의 당군에게 군량을 나르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일행이 호로하에 왔을 때 고구려 군사가 뒤쫓아 달려와서 강안에 진을 치자 … 적들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접전하여 … —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평양에서 신라로 돌아오는 길에 호로하가 있었다. 호로하는 평양과 신라 사이에 흐르는 강이었다는 뜻이다.

673년 기록에도 호로하가 나온다.

당의 군사가 말갈 및 거란 병력과 함께 북쪽 변경에 침입해 와, 무릇 아홉 번을 싸워 우리 군사가 승리하고 … 당나라 군사 가운데 호로와 왕봉의 두 강에 빠져 죽은 이들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3년

둘째는 안북하와 철관성이다. 매초성 전투에서 이긴 675년의 기록이다.

안북하를 따라서 관문과 성채를 설치했으며, 또 철관성을 쌓았다. —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5년

우리나라 주류 사학계는 호로하를 임진강으로, 철관성을 함경남도 덕원으로 본다. 그래서 나당전쟁 직후 신라의 경계를 임진강에서 덕원까지로 그린다. 앞에서 말한 초기 국경선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호로하는 평양에서 신라로 오는 길에 있던 강이다. 평양의 위치가 달라지면 호로하의 위치도 다시 따져야 한다. 앞 글에서 살펴본 대로 고구려의 평양이 요양이었다면, 호로하를 임진강으로 고정할 근거는 약해진다.

민족 사학계에 서 있는 이덕일 역사학자는 호로하를 요하 수계의 강으로, 철관성을 철이 나는 요동의 철령 일대로 본다. 나는 이 설명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좀 더 들어가보자.

요령성 요양 해성 개주 철령 위치 지도
요동의 철령 일대

『요사』가 말하는 신라의 이웃

앞 글에서 소개한 『요사』 기록을 원문으로 다시 읽어 보았다. 그 앞뒤를 함께 읽으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

海州,南海軍,節度。本沃沮國地。… 渤海號南京南海府。 (해주는 남해군 절도이다. 본래 옥저국 땅이다. … 발해는 남경 남해부라 불렀다.)

耀州,刺史。本渤海椒州 … 隸海州。… 統縣一:岩淵縣。東界新羅,故平壤城在縣西南。 (요주는 자사주이다. 본래 발해의 초주였다. … 해주에 속한다. … 현 하나를 거느린다. 암연현이다. 동쪽은 신라와 경계하며, 옛 평양성이 현의 서남쪽에 있다.) — 『요사』 권38, 지리지2 동경도

이 기록에서 세 가지를 읽을 수 있다.

첫째, 요나라의 해주는 발해의 남해부였다. 해주는 지금의 요령성 해성 일대로 본다.

둘째, 해주에 딸린 요주 암연현의 동쪽이 신라와 맞닿아 있었다.

셋째, 옛 평양성은 그 암연현의 서남쪽에 있었다.

청나라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18세기 청나라가 나라에서 펴낸 『흠정만주원류고』에도 신라의 경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신라는 서북쪽으로 길림오라(현 길림시)에 이르고 또한 서쪽으로는 개원과 철령에 가깝다. — 『흠정만주원류고』 (『압록과 고려의 북계』에서 재인용)

청나라는 만주에서 일어난 나라다. 그 나라가 펴낸 만주의 역사책이 신라의 경계를 개원과 철령 가까이로 적었다.

통일신라의 국경선, 다시 묻다

정리하면 이렇다.

  • 『삼국사기』는 '패강 이남'이라고만 말한다. 후기 국경선의 대동강도 원산만도 말하지 않는다.
  • 『삼국사기』의 호로하는 평양과 신라 사이에 있던 강이다. 평양의 위치가 바뀌면 호로하의 위치도, 초기 국경선도 바뀐다.
  • 『요사』는 발해 남해부였던 해주의 관할 현 동쪽이 신라였다고 말한다.
  • 『흠정만주원류고』는 신라의 서쪽 경계가 개원·철령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나는 이 기록들이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통일신라의 북쪽 경계는 대동강과 원산만이 아니라 요동 어딘가에 있었다.

교과서의 국경선은 기록이 아니라 일본 식민사학과 현재 한국 주류 사학의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다. 그리고 그 해석의 출발점은 '평양은 지금 북한의 평양' '패강은 대동강'이라는 전제에 근거를 둔다. 그 전제가 틀리면 그들이 말하는 통일신라의 국경선도 틀린 것이 된다.

이 전제에 대한 답을 아직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분이라면 아래 관련 글들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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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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