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우리 국경이 축소되어 가는 과정

이전 글들을 통해 나는 평양과 압록강, 천리장성과 동북9성, 그리고 통일신라의 북쪽 경계까지 하나씩 확인해 왔다. 결론은 매번 같았다. 고대의 우리 국경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위치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이 넓었던 국경은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지금의 한반도 안으로 줄어들었을까?

「고려사」는 국경을 줄이지 않았다

먼저, 조선 초에 작성된 「고려사」에 기록된 국경 위치를 살펴보자.

서로는 고구려를 넘어서지 못하고, 북으로는 고구려의 영역을 넘어서서 공험진 선춘령에 이르렀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고려사」 「지리지」 인용, p.9)

「고려사」에서는 국경을 한반도 안으로 축소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경이 줄어든 기록의 시작, 1615년 한백겸과 길주이남설

국경이 실제로 줄어드는 것은, 「고려사」가 편찬되고도 한참 뒤의 일이다.
그 시작점은 조선 중기, 1615년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다. 한백겸은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을 함경도 길주 이남으로 비정했다.

동북9성 길주 이남설은 한백겸에 의해 작성된 「동국지리지」(1615년)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한백겸은 「동국지리지」 「동계」조에서 9성의 설치 범위는 홍원(洪原)부터 이성(利城) 사이이며, 선춘령은 마천-마운령 사이로 보았다... 한백겸은 동북9성이 길주 이남에 있다고 주장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이인철,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의 위치 연구」, p.88)

이 판단은 처음부터 틀린 것이었다. 한백겸은 함경남도 마운령에서 발견된 비석을 윤관이 세운 선춘령 정계비로 잘못 짚었는데, 이 비석은 1929년 최남선에 의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마운령비)임이 밝혀졌다. 그런데도 길주이남설은 그 뒤로도 계속 답습되었다.

책은 이 오류의 뿌리를 당시의 역사관에서 찾는다.

길주 이남설의 형성은 당시의 사대적인 역사관인 소위 '정통론'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극히 사대주의(事大主義)적인 정통론에서는 고대사부터 당대(當代)까지의 역사 강역을 한반도 이내에 설정하려 했는데, 이에 따라 동북9성을 두만강 이남의 한반도에 위치시킨 것이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p.88)

같은 챕터의 국문초록에는 이 정통론의 성격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첫째, '길주 이남설'은 조선시대의 '정통론'이란 소중화(小中華)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으로써, 한백겸이 「동국지리지」에서 마운령 정상에 존재하는 '석추구기(石樞基)'가 진흥왕순수비라는 것을 확인하지 못한 채, 윤관의 선춘령 정계비로 추정한 결과이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p.83)

정통론은 왜 하필 이 시기에 힘을 얻었나

정통론(正統論) 자체는 원래 중국 역사학에서 나온 오래된 개념이다.
여러 나라나 왕조가 나뉘어 있을 때, 그중 어느 쪽이 정당한 계보를 이어받았는가를 따지는 논리다. 문제는 그 "정통"을 가리는 기준이 영토의 크기가 아니라, 중화(中華)적 예의와 질서를 얼마나 갖추었는가에 있었다는 데 있다. 이 기준에서 보면, 드넓지만 "오랑캐 땅"으로 여겨지던 만주는 애초에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역사의 무대는 자연히 예의와 문명이 갖춰진 한반도 안으로 좁혀졌다.

여기서 한 가지, 나는 이 책이 다루지 않은 부분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1615년이라는 시점이다. 이 해는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 지 겨우 17년 뒤다.

임진왜란 때 조선은 명나라의 원군을 받아 나라를 지켜냈고, 이 일은 "명나라가 다시 나라를 세워주었다"는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 의식으로 조정과 사대부 사회에 널리 퍼졌다. 전쟁 초반 의주까지 피난했던 선조로서는, 이 재조지은을 강조하는 것이 자신의 무능을 가리고 왕권을 지키는 방편이기도 했다. 이 시기 임진왜란·병자호란사를 깊이 연구한 한명기 교수 등은, 이 재조지은론이 선조 이후 조선 조정에서 정치적으로도 적극 활용되었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조선은 명에 대한 의리를 나라의 정체성으로 삼는 쪽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기울었다.

한백겸이 「동국지리지」를 쓴 것은 바로 이 분위기 한가운데였다. 뒤이어 1636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청에 무릎을 꿇고, 1644년 명이 완전히 멸망하자,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제 중화 문명의 정통을 이은 것은 청이 아니라 조선뿐"이라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으로 나아갔다. 정통론이 한반도 안으로 역사를 가두는 논리로 굳어진 데에는, 이렇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깊어진 사대주의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명분과 의리를 지키는 일이 나라의 중심이 될수록, 우리 스스로 개척했던 북방의 기억과 자부심, 즉 민족정기는 그만큼 설 자리를 잃어갔다. 

조선 중기, 우리나라 민족정기를 죽이고 우리 민족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해악을 끼친 인물은 누구였을까? 바로 선조다. 선조에 대한 내용은 내가 연재하고 있는 다른 블로그의 글을 읽어 보시면 좋겠다.

👉 관련 글 바로가기 ⑧ 선조, 비열함의 끝판왕이자 조선 망국의 출발점

이 흐름은 한백겸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

역사지리서인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유형원의 「동국여지지」·신경준의 「강계고」·안정복의 「동사강목」·한진서의 「해동역사」·정약용의 「아방강역고」·윤정기의 「동환록」·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에는 동북9성을 한반도 동북부 두만강 이남의 길주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p.86)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이름난 역사지리학자들이 거의 예외 없이 이 축소된 국경을 그대로 따랐다. 앞선 글(1편)에서 소개한 정약용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1900년대~1937년, 식민사관이 확정한 국경

이 흐름은 조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1900년대 초, 일본 학자 쓰다 소우키치는 정약용과 놀랍도록 닮은 태도로 고려의 국경을 그었다.

이 같은 쓰다의 고려사 인식은 그보다 200년 전의 정약용과 다를 것이 없었고 나을 것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의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 너머라는 고려인들의 인식은 그들의 거짓말 하는 버릇에서 비롯된 환상이라고 폄하하였다. 그러면서 그런 대표적인 거짓말쟁이로 [강동 6주 담판의] 당사자인 서희를 들면서 바로 그가 고려 국경선 비정에 혼란을 초래한 원흉이라고 성토하기까지 하였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p.8)

서희는 993년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 6주, 즉 강동 6주를 고려 땅으로 확정지은 인물이다. 쓰다는 이 서희를 "거짓말쟁이"로 지목하며, 「만선지리사」에서 이렇게 평했다.

우리는 고려 사람이 그 영토권을 요구할 때 항상 그 역사적 연유를 사실보다 과장되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쓰다 소우키치, 「만선지리사」 인용, p.8)

쓰다 한 사람의 주장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뒤이어 일본 관학자들의 연구가 잇따랐다.

동북9성의 위치를 한반도 안에 비정한 연구들로 대일항쟁기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1913년에 작성된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의 논문, 1921년에 작성된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의 논문, 1931년에 작성된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의 논문 등에서 동북9성을 함흥평야 일대에 비정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주관하여 1937년[1932년]에 간행한 「조선사(朝鮮史)」에서도 동북9성의 위치를 두만강 이남 함경도 남부의 지명들로 확정하여 표기하였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p.86~87)

이렇게 세 학자의 논문을 거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펴낸 「조선사」에서 국경은 국가 차원의 공식 기록으로 굳어졌다. 그 결과를 책은 이렇게 요약한다.

서희를 비판한 쓰다가 그린 고려의 북방 국경선은 100년이 흐른 지금까지 학계의 정설로 받들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사의 고려 관련 기사를 원사서와 면밀히 비교 검토한 결과 한국사에서 일본의 왜곡의 정도가 가장 극심한 것이 고려시대, 그것도 지리 고증 부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압록과 고려의 북계』, p.9)

글을 마치며

「고려사」는 국경을 줄이지 않았다. 국경은 임진왜란 이후, 1615년 한백겸에게서 처음 줄어들었고, 그 바탕에는 사대주의적인 '정통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정통론은 임진왜란 이후 깊어진 재조지은 의식과 존명사대, 병자호란 이후의 소중화 의식이라는 시대적 흐름 위에서 힘을 얻었다. 이렇게 축소된 국경은 1913년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진 일본 관학자들의 연구와 조선총독부의 「조선사」를 거치며, 국가가 확정한 공식 기록이 되었다.

그런데 이 식민사관이 만든 국경은, 광복 이후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1990년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중학교 국사 교과서와 2014년 금성출판사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동북9성은 여전히 함흥평야 일대나 길주 이남으로 그려져 있다.

진짜 문제는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경이 왜곡된 것 자체보다, 그 식민사관을 광복 80년이 지나도록 우리 스스로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역사 학자도 아니고 역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닌 나는 우리나라 역사 학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몸철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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