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우금치 아리랑 이야기 (상편)

저는 매천야록 이야기를 마치며 다음 글에서 우금치 아리랑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여러분에게 약속드렸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그 노래와 시 이야기를 풀어놓기 전에, 먼저 우금치라는 이름이 어디서, 어떤 일로 우리 역사에 새겨졌는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금치는 어디에 있는 고개인가

우금치(牛金峙)는 충청남도 공주 금학동에 있는, 얼핏 보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야트막한 고갯길입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이자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로 들어서는 요지였다는 것 말고는, 지도 위에서 특별할 것 없는 지명입니다.

우금치 고개
우금치 고개

그런데 이 이름 없던 고개가 1894년 음력 11월 9일, 조선의 운명을 가르는 자리가 되어버립니다.

무엇을 위해 우금치 고개를 넘어가려 했는가

1894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은 삼례에서 다시 봉기를 일으킵니다. 1차 봉기와는 목적이 달랐습니다. 이번에는 부패한 관리를 벌하자는 것을 넘어, 경복궁을 강점하고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손을 뻗친 일본군을 몰아내자는 항일과 자주의 기치였습니다. 

전국적으로 20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봉기했습니다.

삼례에 모인 농민군은 논산으로 북상했고, 최시형과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의 농민군과도 합류하여 그 세를 키워나갔습니다. 이렇게 모인 이들이 향한 곳이 바로 공주였고, 공주로 들어서는 마지막 관문이 우금치였습니다.

우금치 고개에서 벌어진 학살

1894년 11월 9일, 동학농민군은 효포, 웅치, 우금치 세 방면에서 공주를 포위하고 우금치 고개를 향해 진격합니다. 그러나 고개 위에는 조선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부대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무기의 격차는 참혹했습니다. 농민군 대다수는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한 반면, 조일연합군은 독일제 크루프 야포와 캐틀링 기관총, 사거리 1.8km에 달하는 소총으로 무장한 정예병이었습니다. 농민군은 수적으로는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엄폐물 하나 없는 1km 남짓한 오르막을 밀집대형으로 수십 차례나 오르내리며 고개를 향해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대형은 야포와 기관총 앞에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습니다.

이 싸움을 두고 훗날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두 편의 군대가 대등하게 맞서 싸운 것이 아니라,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끝난 싸움이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저 역시 그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 우금치에서 싸운 일본군은 200여명 정도였고 조선 관군은 1500여명 정도로 합계 1700명 정도였습니다. 학살이 끝나고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고 전봉준 장군이 이끌던 2만명의 농민군은 단지 500명만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고개를 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무너졌다

우금치에서의 패배는 단순히 전투 하나를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패배를 기점으로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급속히 와해되었고, 항일 봉기의 동력 자체가 꺾여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역사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입니다. 을미사변, 을사늑약, 그리고 결국 경술국치까지.

만약 그날 우금치 고개를 2만 동학농민군이 넘었더라면 전국적으로 봉기한 20만 명의 동학농민군과 함께 조선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우금치, 망국으로 가는 길에서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자리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사연구초》에 실은 글에서 고려 중기의 묘청의 난을 두고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묘청과 김부식의 싸움을 낭·불 양가 대 유가,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고, 묘청이 패함으로써 우리 역사가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을 잃고 사대와 노예성에 물들게 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서경 천도 운동의 실패라는 하나의 사건이, 그 뒤 수백 년 우리 민족정신의 방향을 갈라놓았다는 통찰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읽으며 고려 말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의 건국을 떠올립니다. 묘청의 난에서 이긴 사대의 논리는 위화도 회군을 거쳐 조선이라는 한 나라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조선은 나라 이름까지 명나라 황제에게 받아 시작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위화도 회군과 조선의 건국을 우리 역사에서 제일 비극적인 사건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려시대 연재 「⑫ 위화도 회군, 사대주의가 나라를 세우다」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나라는 500년 뒤 망국의 길 앞에 섰습니다. 우금치는 그 길에서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자리입니다. 우리 백성이 외세에 맞서 스스로 새 세상을 열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우금치에서 꺾였습니다. 죽창을 든 이들이 야포와 기관총 앞에 쓰러진 그 순간, 조선은 자력으로 근대를 감당할 힘도, 일본의 침탈을 막아낼 힘도 함께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패배는 을미사변과 을사늑약, 경술국치로 이어지는 몰락의 직행로를 열어버렸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우금치를 망국으로 가는 길에서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사건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위화도 회군과 조선의 건국이 사대를 나라의 뼈대로 삼은 사건이었다면, 우금치는 그 나라 안에서 백성들이 스스로 일으켜 세운 기상이 마지막으로 무너져 내린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이야기에 대하여

저는 우금치 고개를 지금까지 2번 방문했습니다. 첫번째는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방문을 했고 두번째는 공주가 고향이신 지인 분과 함께 방문을 했습니다. 첫번째는 비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고 두번째는 바람만 강하게 불던 날이었습니다. 첫번째 아버지와 방문을 한 후 우금치 아리랑이라는 시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두번째 방문할 때는 시를 완성한 상태로 방문을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우금치 아리랑을 노래로 만들어 불러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된 것은 아마도 두번째 방문 이후일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우금치를 방문한 저의 체험에 대해 소개하려 합니다.

👉 다음 글 바로가기 ④ 우금치 아리랑 이야기 (중편)

몸철학 드림

댓글